헤르만 헤세는 어떻게 불안을 다뤘을까? |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데미안

2025. 11. 3. 10:42그냥,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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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싯다르타><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난 뒤, 난 작품에 대한 호기심보다 오히려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에 대해 너무 궁금해졌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제도에 의해 신경쇠약에 걸렸던 헤르만 헤세, 그는 그 불안을 8천만 부 이상 발행되는 글을 쓰면서 해소를 했다. 

누구에게나 불안과 결핍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제일 관건이지 않을까?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면, 작가 자신의 어린시절을 투영했던 작품이니만큼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불안한 모습들을 독자들은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어? 대충 넘어가면 안돼? 라고 느낄 수 있겠지만, 헤르만 헤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공교롭게도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면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자꾸만 떠올랐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다자이 오사무에 비해 헤르만 헤세는 스스로 극복했던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헤르만 헤세가 스스로 해소하려 노력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는 아주 감히.. 기특하다 여겼다. 

 

 헤르만 헤세는 부모와 외조부 모두 신학을 공부했었기 때문에,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모태신앙만 가지면 다행이게? 또 신학교까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영특함을 지녀,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신을 믿는게 아닌, 신학을 공부하는 신도의 길을 걸었어야 했었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다보면, 처음부터 신학의 길이 힘들게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다. 나름 자신이 공부를 꽤 잘하기 때문에, 못하는 아이들을 우위 선상에서 내려다보기도 했다. 나름 그 위치를 즐기기도 했던 것이다. 다만,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다보니 완벽주의적인 성향도 띄게 됐을 것 같고, 사소한 실패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투영한 작품인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는 자유를 갈망했지만, 소속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스는 애착 대상 또한 없었다. 한스는 마음놓고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사실 내 생각으로 한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신에 대한 비난, 원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스는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순, 위선을 괴로워 했던 것 같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도, <수레바퀴 아래서>도 자신을 투영한 인물과 자신이 되고 싶은 추구미 캐릭터를 하나씩 넣어둔다. <데미안>에서는 싱클레어가 되고 싶은 인물은 데미안을 설정했고, <수레바퀴 아래서>는 한스가 되고 싶은 추구미인 하일너를 심어뒀다. 나의 최애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최근 작품 <바닷가의 루시>에서, 주인공 루시 바턴은 아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에게 응당 받아야 하는 사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항상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가상의 따뜻한 엄마 캐릭터를 만들어 스스로 위로 받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과 하일러를 통해 스스로 되고 싶은 사람을 구현한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타인으로부터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비롯된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헤르만 헤세는 애착형성이 부족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수레바퀴 아래서><데미안>을 읽어봤을 때, 단단한 애착 관계가 형성된 것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또한, 내 생각에 한스와 싱클레어는 둘 다 현실이 맘에 들지 않지만 나름 끼워맞춰보려고 노력하는 인물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처한 환경과 제도가 너무 맘에 들지 않지만, 투쟁을 하기엔 스스로 너무 나약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데미안과 하일너라는 자유로운 영혼들을 넣어 스스로 나약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투영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수레바퀴에서 한스는 끝내 죽음을 맞이했지만, 데미안에선 전쟁에 참여하며 주체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니.. 독자로서 헤르만 헤세의 심경의 변화를 관전하는 포인트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싯다르타>처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인물을 그려내기도 한다. 많은 고난과 시련을 직접 겪고서야, 아~ 이런게 인생이구나 라고 떠오르는 순간을 써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싯다르타>를 읽으면서 정말 헤르만 헤세라는 사람에 대해 너무너무 궁금해졌다. 이 불안과 결핍이 난무하는 시대를 맞서기 위해 스스로 어떤 투쟁을 벌이고 있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사실 나는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가 성인 군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난세를 이겨내고 싶어 성인(聖人)처럼 세상을 대하고 싶은 것 같았다. 이 놈의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건 내 마음인 것이다. 그는 싯다르타를 통해 자신의 마음, 내면의 신을 다스리는 것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라는걸 강조했다고 생각했다. 

 

 이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나는 판단할 수 없지만 간혹가다 어떤 사람들은 노벨문학상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말하기도 하나보다. 나는 그의 작품에서 어떤 매력을 느꼈다기 보다, 작가 자체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 수도 없이 스스로의 분신들을 써내려가며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했던 작가가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내 생각엔 헤르만 헤세가 작가로서 꽤나 야욕도 있었다고 느낀다. 독일에서 한동안 그의 작품을 금서로 취급했을 때, 데미안을 통해 '전쟁 자체가 싫다는건 아니었어요...'라고 은근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꼭 스스로 구원하길 원하는 신학도처럼 꼿꼿하지 않고, 자신의 글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도 뿜어내는 헤르만 헤세가 멋있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그의 작품을 통해 많은 이들이 위로를 받았다면,

 나는 그의 작품들이 넘치게 노벨문학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들은 어떠신지요? 

 <유리알 유희>까지 읽고 쓰고 독후감을 쓰고 싶었지만, 헤르만 헤세 작품 너무 우울바리해서 잠깐 멈추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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