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그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를 향하여 돌아가면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 행위들의 연속을 응시한다. 이 행위들의 연속이 곧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의 기억의 시선 속에서 통일되고 머지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기를 원하는 장님 그리고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떨어진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남겨 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돌의 입자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자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지프 신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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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8937463433
이 책을 읽기 전에, 목차를 확인하고 <시지프 신화>를 읽는 것을 추천한다. 시지프는 코린토스의 왕이었는데 자신이 다스리는 곳에 물이 필요했기에 신들의 비밀을 고발했다. 신들은 그를 지옥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시지프는 지옥으로 데려가려던 사신을 쇠사슬로 묶어버렸단다. 그리고 결국 지옥에 가게 됐는데, 플루톤(하데스)에게 아내에게 복수를 한다고 인간세상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이걸 보내준 플루톤은 은근 자비로운 캐릭터?ㅋㅋㅋㅋ )하여튼 아내에게 복수는 커녕, 인간세계로 돌아가자마자 살아있었을 때보다 죽고나니 훨씬 아름다운 것을 깨닫고 지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신들은 할 일이 없는 편인지라, 시지프에게 하찮고 형편없고 힘든 일은 평생하라고 벌을 주었다. 그 벌은 바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것이다. 바위를 올려두면 다시 밑으로 굴러간다. 그럼 또 반복해서 올려놓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시지프가 살아 생전 신들이 인간에게 행하는 부조리에 저항했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지옥에서 돌아온 뒤,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던 시지프. 신들 기준에서는 보람없이 하찮고 고된 형벌이었으나 꿋꿋하게 해쳐 나가는, 신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려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시지프는 신들에게 잘못했다고 빌지 않았고, 그 형벌을 꿋꿋하게 받고 있으니 얼마나 강한 사람인가? 카뮈는 매번 부조리에 저항하며 자신의 신념을 증명해 나가는 태도에서 영감을 얻을 것 같다.
왜 제목을 <시지프 신화>로 지었으며, 왜 부조리를 시지프를 통해 말하고자 했는지 읽기 전에 알아두는 것이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부조리의 추론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이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알베르 카뮈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은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봤다. 카뮈는 삶의 부조리를 인정하지만, 자살은 인정하지 않는다. 자살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스스로 삶을 놓을 때, 그에 따른 생각, 사상, 감정 등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삶과 대립하고 있기에 선택하는거라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부딪히는 그 이념 자체가 세상의 부조리인 것이다. 부조리라는 것은 누군가가 정해 놓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어디서나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사회, 사회 대 사회 안에서 대립하게 될 때 겪는 불만, 고립 등이다.
세상의 부조리 때문에 자유롭고 싶다고?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이 세상을 떠나 자유로워지겠다고? 보통 우리는 자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농경사회, 계급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유로운 마음을 느끼지 못했을까? 지금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넘쳐나는 돈이 있다면 항상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유라는 것은 어쨌든 사회, 환경이 주어진 규범 안에서 제한적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자유라는 것은 사실 사회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얻는 것이라 말한다. 사회, 국가에서 제공하는 자유 속에서 부조리를 낳고, 그 부조리 속에서 또 다른 부조리를 낳고, 사회가 주는 자유 속에서 또 자유를 갈망하고... 그냥 도돌이표 그 자체! 이렇게 부조리는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것 때문에 죽는 건 말도 안된다고 열심히 두들겨 패는 카뮈.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세상의 부조리 때문에 자살하는 것은 회피라고 말한다. 진정한 자유는 내가 가진 세상에 살아가면서 저항하는 것을 증명하는 곳에서 온다고 한다. 내가 가진 생각이 맞다고 증명을 하던지, 내가 가진 생각이 정말 진리인 것인지 계속 사유해야 한다.
계속 살자, 살자 강조하는 카뮈를 보며 드는 생각이 있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과 같은 전체주의 정권에 의해 유럽이 폭력과 파괴, 도덕적 붕괴에 휩싸이던 시절에 <시지프의 신화>를 썼다고 한다. 아마 전통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과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세상이 적응이 안 된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까? '내가 이런 신념을 갖고 살면 뭐해! 어차피 세상은 이렇게 바뀌는데.' 라며 허무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카뮈는 당시 사람들이 이 세상을 버텨냈으면 하는 마음, 그래도 살았으면 하는 마음, 같이 저항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쓴 게 아닐까? 나도 당연히 자살을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그 모든 선택을 어떻게 다 막을 수 있겠는가.. 아, 나도 이 부조리를 지금 회피하는 중?! 알베르 카뮈에 따르면 내가 생각한 신념이 있다면 회피하지 말고 끝까지 반대해야 하는거.. 맞지?ㅋㅋㅋㅋ
부조리한 인간
나는 처음에 돈 후안이 카사노바인줄 알았는데, 카사노바는 실존인물이고 돈 후안은 문학적으로 창안된 인물이라고 한다. 아래 내용에선 카사노바는 여러 여자를 만났지만, 한 번에 한 명과 사랑했다고 한다. 나름 정착을 안 하더라도 관계에 집중하는 성의라도 보인 것 같다. 하지만 돈 후안은 여자들을 건들면서 명예를 빼앗는 일을 일삼는 사람으로 쓰여 있다.
출처: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26/2010022602033.html
부조리한 인간에 대해 말하는 두번째 장에서는 부조리한 캐릭터 그 자체인 돈 후안을 토대로 이야기한다. 글쎄, 내가 읽으면서 느낀 것은 돈 후안 자체는 열렬한 사랑으로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지만 사회적으로 그의 사랑은 완전 민폐였다. 사회적으로 따지면 그는 부조리한 인간이지만, 그의 인생 자체로 따지면 자신이 원하는 것에 열정을 퍼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돈 후안에게 벌을 주길 원했고, 신이 그에게 내린 징벌로 인해 사이다를 마셨을지 모르겠으나, 그가 진정으로 벌은 받았다고 생각할까? 오히려 돈 후안도 난 내 삶에 최선을 다 했고, 너희들이 만든 부조리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정복자들은 이따금 승리하는 것과 극복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부조리하게 느껴질지언정, 그것 자체를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 같다. 어쩌면 당시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사회와 계급, 사상 등에 대해 딱히 고려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아가려는 사람, 그 영혼이 풍요로운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 같다. 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수동적으로 내맡기는 행동 자체도 회피라고 본다.
부조리한 창조
창조는 나날의 노력, 자기 억제, 진리의 한계들에 대한 정확한 판단, 절도와 힘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고행이다. 그런 모든 것이 ‘덧없는 것을 위해서’, 되풀이하고 제자리걸음하기 위해서다.
"시지프 신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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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가 말하는 창조는 두 번 사는 것이다. 이미 삶에서 느끼는 부조리들을 느끼고, 이 것을 증명해나가거나 맞서나가는 과정을 열정으로 삼아 새롭게 살아가는 과정이다. 과거로부터 철학은 항상 부조리를 느끼고, 그에 증명해내려 노력했다. 철학 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 또한 그 증명해내려 노력한 삶의 태도를 작품 속에서 창조시켰다. (그렇다고 예술 작품은 작품일뿐, 진정한 증명이라고 여기진 않는다. 살아있는 순간 내내 증명해내는 것이 진정한 창조라고 생각하는듯...;)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키릴로프>를 통해 사람들에겐 명작이지만, 본인에게는 딱히 창조할만한 책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신을 통해 실존적 가치를 느끼지 못함으로 자살을 하게 되어 하늘에서 영생을 얻는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거냐고 열받은듯ㅋㅋ 알베르 카뮈가 이 책을 쓸 당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허무해하지말고 맹렬히 싸우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이 모든 것에는 현실적 의미가 없다. 자유의 길에서 아직도 한 걸음 더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혈족의 정신들인 창조자나 정복자에게 요구되는 최후의 노력은 자신들의 기도(企圖) 그 자체로부터도 스스로를 해방할 줄 아는 일이다
"시지프 신화"중에서
이 책을 읽고 느낀 것은 정말 사람들이 맞서 싸우길 원하는 알베르 카뮈의 진심이 느껴졌다. 실존적 의미를 찾기 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고, 스스로 부조리한 것에 대항하길 원했다. 이 세상에 정답은 없다. 그저 살아남은 자가 승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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