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단편4 [아주 짧은 단편: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 4편: 눈을 감다 나는 어릴 적부터 무서운 것을 곧잘 보았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버릇이 있었다. 아무리 무서워도, 아무리 징그러워도 나는 끝내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찰나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순식간에 찡그렸던 표정을 보면 나는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한다. 그래도 유일하게 잘 안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있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어떤 과정으로, 어떤 재료로, 어떤 그릇으로 완성이 되어 내 눈 앞에 놓였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보려는 의지보다 뱃속을 채워야 하는 욕망이 더 크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바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었던 남자와 또 다시 만났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표정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 2024. 10. 8. [아주 짧은 단편]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1) 미정이에게 미정이에게,미정아, 나 윤희야. 잘 지내니? 요즘 날씨가 참 더워서 그런지, 에어컨 때문에 주변에서 많이들 냉방병으로 고생 꽤나 하더라. 나는 냉방병이 도무지 낫지가 않아. 지금 맘같아선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에 가서 비키니만 입고 하루종일 선탠하고 싶다. 여름이 되면 미정이 네 생각이 많이 난다. 2018년 여름 기억나니? 그때 정말 한국 여름 기가 막힐 정도로 더웠던 것 같아. 그 당시 내가 만나던 지훈 오빠 기억나니? 미정이 넌 주용이랑 갓 헤어지고 싱글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우리 이렇게 세 명이서 많이 놀러 다녔잖아. 나는 네가 주용이랑 헤어진다고 했을 때, 많이 놀랐어. 주용이가 취업 준비생이라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너희 둘 성격이 정말 잘 맞아서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지훈 오.. 2024. 8. 2. [아주 짧은 단편]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2) 사랑으로 시작했다 분노로 끝나다 우리는 이탈리아 친퀘테레에 도착했다. H는 구불한 길을 따라 운전을 했고, 나는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진 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친퀘테라는 '다섯개의 땅'이라는 의미인데, 그 유명한 다섯개의 땅 중 가장 중간에 위치한 '코르닐리아'라는 곳에 묵었다. 성인이 된지가 오삼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부모로부터 독립되지 않은 미성숙한 인간이었고, 외국 영화에서나 보는 연인들의 유럽 여행을 H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벌써 이렇게 컸나? 일단 H는 동네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능숙하게 빵, 햄, 치즈 그리고 와인을 샀다. 아, 그리고 야채와 올리브유까지 샀다. 올리브유는 한 번 쓰고 버리는게 아니라 남은 여행 내내 쓸거라는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나는 그저 그렇게 야무지게 장.. 2024. 8. 2. [아주 짧은 단편]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1) 버스 안 출근길 오전 6시 50분, 버스가 4 정거장 전에 출발했다고 한다. 지금 나가면 버스를 탈 수 있다. 도보 거리와 신호등 타이밍까지 고려한 철두 철미한 예측이다. 경기 남부에 사는 나는 사당역을 향한 좌석버스를 탄다. 내가 타는 곳은 버스의 첫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아 버스를 타게 되면 좌석에는 2-3명 정도 앉아 있다. 사당역까지 40분 정도 걸리는데, 가는 내내 버스의 빈자리가 꽉꽉 채워진다. 제발 내 옆자리는 앉지 말길 바라면서, 가방을 살포시 올려두지만 역시나 나의 눈치싸움은 늘 완패. '나 여기 앉을건데?'라고 말하는 시선을 쏘아 받으면 냉큼 치워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평상시 창가 자리보다 복도가 좋지만, 아무래도 출근길은 창가 자리가 좋다. 첫 정류장에 가까운 정류장 근처에 사는 사람의 특권이란,.. 2024. 8. 2.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