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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 Prisa, Sin Pausa
그냥, 단편

[아주 짧은 단편: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 4편: 눈을 감다

by 조잼 2024.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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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amjamzo @Bangkok

 

 나는 어릴 적부터 무서운 것을 곧잘 보았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버릇이 있었다. 아무리 무서워도, 아무리 징그러워도 나는 끝내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찰나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순식간에 찡그렸던 표정을 보면 나는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한다. 그래도 유일하게 잘 안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있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어떤 과정으로, 어떤 재료로, 어떤 그릇으로 완성이 되어 내 눈 앞에 놓였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보려는 의지보다 뱃속을 채워야 하는 욕망이 더 크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바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었던 남자와 또 다시 만났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표정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도 나에게 같은 호감을 느끼고 싶은지 나노단위로 확인해야 했다. 내 마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데이트를 하는 것은 사냥과도 같다. 나의 외모는 뛰어나지 않지만 나는 충분히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재간이 있다. 나의 이야기를 마냥 떠들어대도 웃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찰나의 따분함을 찾으려 애를 쓴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나를 향한 그 눈은 흔들림이 없었고, 그 환한 미소는 항상 나를 향해 지었다. 가끔 지루하거나 피곤해서 하품을 쩍쩍 하더라도 항상 그는 나에게 머쓱한 듯 미소를 내비친 뒤, 내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그와 함께한 지 500일이 넘어간다. 나에겐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언제든 무언가를 끝내 봐야 직성이 풀렸던 나는 웃을 때 눈을 찡긋거리다 못해 아예 깜빡이며 감아버린다. 아예 맘놓고 눈을 감고 찰나를 보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이 사람과 언제 끝이 날지 지켜보기만 했던 예리했던 내 두 눈은 어느새 둔해졌다. 그의 앞에선 마음껏 눈을 감고, 마음껏 보지 않았다. 그는 내가 웃을 때 눈을 꼬옥 감을 정도로 찡긋 웃는 모습이 좋다고 한다. 그가 좋다고 하는 것엔 이유가 있다.  그는 사랑에 빠진 여자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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