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탈리아 친퀘테레에 도착했다. H는 구불한 길을 따라 운전을 했고, 나는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진 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친퀘테라는 '다섯개의 땅'이라는 의미인데, 그 유명한 다섯개의 땅 중 가장 중간에 위치한 '코르닐리아'라는 곳에 묵었다. 성인이 된지가 오삼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부모로부터 독립되지 않은 미성숙한 인간이었고, 외국 영화에서나 보는 연인들의 유럽 여행을 H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벌써 이렇게 컸나?
일단 H는 동네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능숙하게 빵, 햄, 치즈 그리고 와인을 샀다. 아, 그리고 야채와 올리브유까지 샀다. 올리브유는 한 번 쓰고 버리는게 아니라 남은 여행 내내 쓸거라는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나는 그저 그렇게 야무지게 장을 보는 H를 바라보았고, 그는 에이비엔비로 예약해두었던 숙소로 향해 저녁밥을 만들어 주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하지만, 야무지게 차려주는 그를 보고 밥투정을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났다. 우리는 야외 테라스에 간이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친퀘테레의 뷰를 보면서 그가 차려준 빵과 샐러드를 먹었고, 가끔 와인 한모금씩 들이켜 분위기를 냈다.
H와 헤어진지 수 년이 지났다. 가끔 그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이 떠오른다. 너무 아름다웠던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대한 충격, 유럽을 차 타고 횡단하니 드디어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분, 불안하고 위태로운 우리 관계에 잠깐이나마 불꽃놀이를 주었던 추억. 나는 그를 아직도 못 잊었을까? 아니, 나는 그 때 어른이 된 기분과 낯선 해방감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게 끝난 이탈리아 여행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H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른다. 그도 항상 조심스러웠다. 대화가 좋은 방향으로 이어 나가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수 년이 지난 후, 그를 돌이켜보니 그를 이해하나 생각할수록 열받는다.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줄 수 없었니? 꼭 그렇게 다 말했어야 속이 시원했니? 꼭 그렇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어야 했었니? 지난 기억들은 왜곡이 기본값이다. 하지만 무엇이 왜곡인지 알 수 없다. 그 때 콩깍지가 씌여 사랑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던 것이 이제서야 보인건지, 혹은 지금 다른 인생을 살고, 다른 사랑을 받아보니 그가 마치 내 인생의 악당이 된 것처럼 고약한 필터가 씌여진건지. 아마 수 년이 또 지나게 되면, 이 기억들을 왜곡이 되겠지.
H야, 잘 지내. 아니 잘 지내지마. 아니, 잘 지내. 아니, 잘 지내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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