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이에게,
미정아, 나 윤희야. 잘 지내니?
요즘 날씨가 참 더워서 그런지, 에어컨 때문에 주변에서 많이들 냉방병으로 고생 꽤나 하더라. 나는 냉방병이 도무지 낫지가 않아. 지금 맘같아선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에 가서 비키니만 입고 하루종일 선탠하고 싶다. 여름이 되면 미정이 네 생각이 많이 난다.
2018년 여름 기억나니? 그때 정말 한국 여름 기가 막힐 정도로 더웠던 것 같아. 그 당시 내가 만나던 지훈 오빠 기억나니? 미정이 넌 주용이랑 갓 헤어지고 싱글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우리 이렇게 세 명이서 많이 놀러 다녔잖아. 나는 네가 주용이랑 헤어진다고 했을 때, 많이 놀랐어. 주용이가 취업 준비생이라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너희 둘 성격이 정말 잘 맞아서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지훈 오빠랑 너랑 나랑 셋이 재밌게 놀던 것도 한 때였고, 금방 나도 싱글이 됐었지. 그 때 지훈 오빠가 헤어지면서 뭐라고 했는줄 알아? 이렇게 매번 셋이서 노는거 지겹다고 했나? 표면적으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속은 아니었나봐. 하여튼 우리가 같은 해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싱글이 됐던 해였지. 헤어졌을 때,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내가 더 챙겼어야 했는데... 뭔 이런 후회만 잔뜩했던 이별이었지만 그래도 너 덕분에 잘 헤어나올 수 있었어.
3년 전, 8월 미정이 네 결혼식에 내가 부케를 받을 수 있어 정말 영광이었어. 우리 대학시절부터 말했잖아. 결혼하고 안정적인 삶을 갖고 싶다고. 유진씨랑 2년 3개월 연애하고 결혼했다고 했지? 나는 둘이 참 잘 어울렸어. 사랑하면 닮는다고 하는데, 둘이 뭔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미정이 넌 내가 닮았다고 하면 진지하게 정색을 해서, 내가 좀 그 부분은 신경썼던 기억이 나. 너희 집 처음 집들이 가기로 한 날 조금 헷갈릴 때가 있었어. 신혼집에 꼭 필요하다며 로봇청소기를 사달라고 하면서, 꼭 집에 들르길 원하는 줄 알았거든. 집들이를 가기로 한 예정일이 다가올 때까지 아직 집이 준비가 안 됐다며, 기대하지 말라며 계속 말해서 연신 괜찮다고 말했잖아. 로봇 청소기만 원했던 거였나? "와도 되는데, 집들이 음식은 차려줄 수 없고 배달시켜먹자"길래 알겠다고 했지. 그래서 집들이에 가보니, 유진씨랑 함께 준비한 결혼의 자취들이 너무 아름다웠지 뭐야. 왜 너가 그렇게 준비가 안 됐다며 손사레를 쳤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얘. 잘 사는 너의 모습을 보니 친구로써 행복했다.
어쩌다보니 6개월 뒤에, 내 뱃속에 아이가 생겨 결혼을 하게 됐어. 그래서 내 인생에서 예상치도 못했던 결혼을 하게 됐지 뭐야. 신랑이 좋기도 하고, 뱃속의 태산(태명 기억하지?)이의 심장 소리를 들으니 별 수 있니? 하지만 태산이는 뱃 속에 나오자마자 우리 곁을 떠났잖아. 그 때 많이 슬펐는데 미정이 네가 곁에 있어줘서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생겨 결혼은 하느라, 꽤 큰 집으로 골랐잖아. 욕심부렸지. 이래서 설레발 치면 안되는데. 그래도 남편은 나와 죽이 잘 맞아서, 그 집을 우리의 취미와 취향으로 채워나가며 잘 살았다. 네가 가끔 집에 와서 아기방은 그냥 냅두지 그랬냐고 말했지만, 나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어. 자궁에 문제가 생겨 드러낼 수밖에 없었거든.
우리가 쌓아온 많은 추억들이 있지만, 겨우 이 정도만 얘기했는데도 편지지가 벌써 3장을 넘어간다. 글씨를 너무 크게 쓴걸까?
미정아, 보다시피 나 네가 생각하는 정도로 다 갖지도 않았고, 행복하지 않았어. 지훈 오빠가 너와 잠을 잤다는 사실을 1년 뒤에 술 취한 채 나에게 전화해서 털어놓았거든. 날 정말 사랑한다면 네 유혹에 넘어가지 말았어야지. 친구와 남자친구가 잤다는 막장 드라마같은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두 명이나 잃을 수 없었어. 너도 주용이랑 헤어지고 많이 힘들었을테니 지훈오빠랑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이해하려고 했어. 근데 조금 겁이 났는지, 너가 남자친구가 생기기 전까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늦게 소개를 시켜주고 싶었던건 있어. 그래서 난 네가 나보다 먼저 결혼했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다. 더군다나 너가 전부터 말했던 조건들을 모두 다 가진 것만 같아서 앞으로도 잃지 않고 행복하길 바랄 뿐이었어.
내가 아이를 잃은게 불행해 보이지 않았니? 내가 신랑과 그 정도 행복은 누릴 수 있는거였잖아. 왜 또 나의 삶을 뒤집어 놓는거야? 너와의 행복배틀에서 나는 오래 전부터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어. 난 그 정도로 완벽한 삶을 가진 적이 없단 말이야. 왜 나는 차갑게 토막난 채로 우리집 김치 냉장고에 갇혀 있는거니? 내 남편은 잘못이 없었잖아. 왜 함께 토막났어야 한거니?
아니, 미안해. 미정아. 제발 날 여기서 꺼내줘. 나 너무 추워. 내 몸이 다 토막나서 체온을 올리려고 노력해봐도 내 팔과 몸통은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어. 너의 삶보다 내 삶은 항상 부족할거야. 지금도 봐봐. 난 어떠한 온기도 채워지지 않잖아. 언제나 너보다 못한 삶일거야.
이 편지를 받게 되면, 꼭...
| 모티브: 거여동 밀실 살인사건 https://namu.wiki/w/%EA%B1%B0%EC%97%AC%EB%8F%99%20%EB%B0%80%EC%8B%A4%20%EC%82%B4%EC%9D%B8%20%EC%82%AC%EA%B1%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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