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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 Prisa, Sin Pausa
그냥, 책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by 조잼 2024.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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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엄마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소시소패스 취급받은 썰

출처 : 교보문고

이 책의 배경은 프랑스 식민국이었던 알제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작품에 대해 조사하다 알게된 내용인데 알제리 원주민 외에 프랑스인(그 외에도 이탈리아계, 스페인계도 있었다고함)들을 피에 누아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나오는 이름이 있는 사람들(뫼르소, 레몽, 마리, ...등)은 피에 누아르고, 이름이 없이 인종으로 불린 사람들은 알제리 현지인이다. 

 

이방인은 1부와 2부의 작품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1부에서는 뫼르소의 어머니가 양로원에서 돌아가셨지만 때가 되어 돌아가셨다고 생각했고, 업무에 치여 피곤할 뿐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뫼르소는 여자친구 마리를 만났다. 마리는 결혼하자고 징징, 원한다면 알겠다고 한다. 이웃집 사는 레몽이 자기 편에 서서 증인 좀 되어달라고, 복수가 담긴 편지를 써달라고 징징, 원하면 알겠다고 한다. 레몽이 마리 껴서 같이 해변으로 여행가자고 징징, 알겠다고 한다. 레몽이랑 엮이니 자꾸 불청객 아랍인 일행도 함께 엮인다. 알고 봤더니 레몽이 때렸던 전여친의 오빠와 그의 친구였다. 

 뫼르소는 솔직히 남일에 깊게 엮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상, 사람, 관계, 직장, 재산 등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도 솔직히 뭘 딱히 하고 싶지는 않지만 돈이 없으면 의식주를 못 챙기니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성욕은 해결하고 싶으니 마리를 만나기는 한다. 일을 성실하게 하니 파리로 전근 보내줄 수 있겠다는 상사의 말이 딱히 반갑지 않다. 어차피 그렇게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는데 귀찮게 이사까지 해야하다니!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래.. 돌아가실 때가 되었지 하면서 담담하다. 어차피 재미없는 삶이었는데 사회가 나를 가만히 냅두지 않으니 원하는대로 육신이 움직여 준다. 그래서 매사에 피곤하다.

 이렇게 피곤한 뫼르소를 거슬리게 한건 아랍인 일행 두명. 해변에 나름 쉬러 나왔건만 몇번이나 이 사람들을 마주친다. 

 뫼르소도 이웃집 사는 레몽도 피에 누아르고, 그들은 친해지게 됐다. 레몽은 알제리 현지인과 데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폭력을 쓰곤 했다. 레몽은 자신을 떠나려고 하는 그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편지를 쓰려 했는데, 뫼르소가 대신 편지를 써주었다. 레몽과 마리, 뫼르소는 함께 해변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현지인의 오빠인 아랍인이 그 해변을 따라왔다. 몇 번이나 아랍인과 뫼르소 일당은 대치하는 상황들이 벌어졌는데, 결국 뫼르소는 아랍인을 죽이고 말았다. 

 

비록 피고인석에 앉아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논고와 변론이 오가는 동안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마 내 범죄에 대해서보다 나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양쪽의 논고와 변론에 큰 차이가 있었던가? 변호사는 두 팔을 쳐들고 유죄를 인정하되 변명을 붙였다. 검사는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유죄를 고발하되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딘가 좀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대로의 걱정거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나도 한마디 참견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 “가만있어요, 그편이 당신 사건에 더 유리해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나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을 묻는 일 없이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대체 누가 피고인가요? 피고인이 된다는 건 중요한 일이에요. 내게도 할 말이 있어요.” 그러나 깊이 생각을 해 보면, 내겐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서 얻는 재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서, 검사의 논고는 금방 따분하게 느껴졌다. 나의 주의를 끌거나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은 오직 단편적인 말, 몸짓, 혹은 전체 맥락과 동떨어진 장광설 같은 것들뿐이었다.

"이방인"중에서

교보eBook에서 자세히 보기: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8937462665

 

 그리고 2부, 살인자가 된 뫼르소는 결국 재판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살인에 주목하지 않고 뫼르소의 평판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모친의 장례식에서 차가웠던 점,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일상을 살았던 점, ... 등에 주목하여 뫼르소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살인죄에 집중하여 말했다면 오히려 납득이 갔을텐데, 그들은 나의 과거를 토대로 본인들의 잣대로 판단하며 그가 싸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고 말하는 듯 했다. 정작 살해를 당한 피해자 아랍인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변호사가 자신을 좋은 소리로 변호하는 것도 너무 위선적으로 느낀다.

"나는 그냥 햇빛때문에 총 쏜거라구요!"

 그는 결국 사형수가 되었다. 신부님이 들어와서 신께 용서를 빌라고 한다. 뫼르소는 전반적으로 흥분하는 법이 없고, 말도 거의 없는 편이었는데 오로지 이 장면에서만 감정적이었고 말을 많이 했다. 뫼르소는 주어진 삶에 쳇바퀴 굴러가듯 의미없이 사회에 맞춰 살았는데, 처음으로 감정을 갖고 자신의 의지로 살인을 했다. 죄에 마땅한 벌은 응당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로써 삶의 진리와 의미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어머니를 회상한다. 어머니는 양로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남편을 위해, 아들을 위해 사셨을 것이다. 하지만 곧 죽을 때가 다 되어 양로원에 들어갔을 때는 어쩌면 이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을거라는 자유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남자친구까지 만들고,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홀어미를 모시지 않은 뫼르소를 비난하고, 어머니가 외롭게 양로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것에 소름끼쳐한다. 그의 말대로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었다. 어머니는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삶의 자유와 신념을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처럼 사형수가 된 뫼르소 또한 죽음 앞에 가까워지니 자유로워졌다. 이젠 삶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응당 내가 치룬 죄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증오해주길 바라고, 나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룰 준비가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하고 싶어서 벌인 일이지 않나?

 


 <이방인>, <시지프 신화>, <페스트>는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3부작이라고 한다. 나는 2부작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만 읽으려고 한다.... (읽어야할 책이 너무 많음...ㅠㅠ) <이방인> 2부에서 뫼르소는 부조리에 대항하는 듯 보인다. <시지프 신화> 내용을 참고해서 읽다 보면 삶의 종결을 부조리에 대항하면서 그를 증명하려고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결국 1부에서 보면, 뫼르소 또한 부조리를 저질렀다. 매번 올곧지 않았고, 타인을 존중하는 듯 했지만 겉핥기에 불과했다. 충분히 뫼르소도 위선적일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마리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데 욕정을 채울만한 상대가 딱히 없으니 결혼하겠다고 응한 것, 레몽에게 폭력을 당하던 여자를 구해주지 않고 레몽 편에 선 것,... 

 물론, 사회가 추구하는 시민의 태도라는 것이 있긴 하다. 적당히 교육과정 거치고, 거슬리는 범죄 저지르지 않고, 적당히 가정 만들어서 아이 낳아라. 누군가 슬퍼하면 슬퍼하는 시늉도 할 줄 알아야 하고, 누군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는 시늉도 좀 할 줄 알아야 한다. 뭐 말 안 해도 알지? 어? 적당히 어? 뫼르소는 사회가 시민의 성격들을 일괄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부조리하게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게 부조리라고 생각한 것은 뫼르소고, 다른 사람들은 이게 선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선과 악을 나눌 수 없다. 내가 생각한 선이 누군가에겐 악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사회의 규칙들을 무시하고 그저 나 하고픈대로 살아야 하나? <시지프 신화>에 따르면, 부조리한 감정은 누구에게나 온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부조리한게 맞는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증명해 나가야 하고 추후에 증명이 됐다면 한 번 대항하는 삶을 살아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시지프 신화>를 다 읽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책 이야기는 길게 못할 것 같다. 내 생각에 우리가 살아가려면 공감과 자기합리화가 필수인 것 같다. 공감이 되어야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이해를 한다. 자기 합리화가 되어야 자신이 갖고 있는 환경 안에서 행복과 웃음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의문이다. 이런 질문이 폭력적이라는 알베르 카뮈의 다음 이야기를 얼른 마저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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