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에 이은 작품 2권을 연달아 읽어보았다. 현재까지 한강 작가의 책을 총 4권이나 읽으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가가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작품에 투영하는지 나도 모르게 단정짓게 된다. 작가는 한 작품을 쓸 때마다 몰입을 하기 때문에, 작품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듯하다. 예를 들면,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항쟁에 관해 쓴 글인데, 본인이 직접 발 벗고 뛰어 다니면서 쓴 글이었고 수많은 폭력과 인간의 양면성을 써내려가면서 많이 아팠다고 했다. 이 아픔이 잘 해소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나에게 어려웠다. 그리고 너무 어두워서 가끔 이 감정들을 습득하는데 시간이 걸리곤 했다. 작가는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맞았고, 나는 총 4권의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여전히 작가가 말하고 싶은 심연에 도달하지 못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은 열려있는 작품이고, 대답을 요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작품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그 심연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 내가 계속 읽는 내내 명확하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 작가의 캐릭터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작가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트릭인 것 같다.
나는 한강 작가의 책이 오랫동안 여운이 남고 나에게 의문을 품어 질문을 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데, 명확하게 맺음을 짓는 영화도 좋지만 오랜 시간동안 내 머리와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아 의문을 품게 하는 작품들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감히 "좋은 작품"은 나를 계속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제가 명확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답이 있는 작품들 또한 매력이 있지만, 나 또한 그 작품에 대해 빨리 결론 짓게 되어 오랜 시간동안 생각이 나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
출처: https://ch.yes24.com/Article/View/18881
많고 많은 언어 중에 왜 '희랍어'일까?
'희랍어'는 그리스어, 라틴어를 말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입을 열지 못하는 여자와 눈꺼풀을 열지 못할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여자는 처음부터 말을 못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천재, 영재라고 부를만큼 많은 작품들을 섭렵했었고, 그녀는 언어, 글, 문자를 좋아했다. 하지만 청소년 시기에 그녀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병원까지 다니며 상담을 받아봤지만 결국 말이 나올 수 있었던 계기는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쌩뚱맞은 독일어를 배우게 됐을 때였다.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된 중년의 그녀는 또 말을 잃었다. 오래 전 새로운 언어를 배웠을 때 입을 열 수 있었던 것처럼 '희랍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보려고 했다.
고대 희랍어에 수동태와 능동태 말고 제3의 태가 있다는 것, 지난 시간에 잠깐 설명했지요?
그녀와 같은 줄에 앉은 남학생이 힘주어 고개를 주억거린다. 뺨이 통통하고 이마에 잔뜩 여드름이 익은, 영리한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의 철학과 2학년생이다.
여자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의예과를 간신히 졸업하긴 했지만 타인의 삶을 책임지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의학사를 공부한다는 대학원생의 옆얼굴이 보인다. 턱이 겹쳐지는 통통한 얼굴에 검고 동그란 뿔테 안경을 낀 거구의 그는 언뜻 보기에 태평한 성격이어서, 쉬는 시간이면 여드름투성이의 대학생과 낭랑한 목소리로 끝없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수업이 시작되는 즉시 그의 태도는 바뀐다. 실수를 두려워한다는 것, 매순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역력히 드러난다.
우리가 중간태라고 부르는 이 태는,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합니다.
"희랍어 시간"중에서
교보eBook에서 자세히 보기: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8954616515
희랍어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능동태, 수동태 외에도 중간태가 있다. 마치 중간태는 뭔가 운명을 일컫는 낭만있는 문법 같았다. '사랑하다'라는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인가를 사랑해서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된다는 운명같은 이야기같다. 눈꺼풀이 열리지 않을 남자에 대해 말을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다. 그의 집안에서 남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시력을 잃게 되는 유전적인 병(?!)에 걸렸다. 그는 나이를 먹을 수록 곧 시력을 잃게 된다는 숙명이 두렵기도 했다. 점자도 배우지 않았고, 어둠에 의존하려는 노력을 딱히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다가올 숙명을 기다리면서 시력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과의 관계도 많이 잃어왔다.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뗄 수 있는 언어
남자는 희랍어 강의를 하는 강사, 여자는 희랍어 수업을 듣는 수강생이다. 둘이 서로를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닿을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그녀는 온전히 침묵했고, 그는 보이지 않을 때에 비로소 서로에 대해 알아갈 수 있었다. 어쩌면 희랍어의 중간태는 그녀와 그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서로를 만나기 위해 잃을 준비를 하고, 잃어갔던게 아닐까?
남자는 귀가 들리지 않는 목수 애인이 있었다. 그는 목수 애인을 만나면서 수화를 배우곤 했다. 어느 날 그 애인에게 넌지시 던졌던 말이 그들을 헤어지게 만들었다. 남자는 미래에 눈이 멀테니 말하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결국, 희랍어 시간에 만난 여자와 침묵 속에서 같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작가는 그들의 침묵 속의 대화를 '인간의 연한 부분'을 통해 소통한다고 위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희랍어 시간>은 나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책이었다. 남자는 시각 장애가 예정되어 있었고, 여자는 불시에 말을 잃었다. 여자는 하고 싶은 말이 없어 말을 잃은 것은 아니다. 남자는 대대손손 남자들에게만 내려오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삶을 피할 수 없었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 그 동안 외로웠던 삶을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통해 '숲'이라는 말을 내뱉음으로 다시 또 이 험난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러나 저러나 우리는 살아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흰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그 책의 시작은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의 기억이어야 할 거라고, 그렇게 걷던 어느 날 생각했다. 스물네 살의 어머니는 혼자서 갑작스럽게 아기를 낳았고, 그 여자아이가 숨을 거두기까지 두 시간 동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계속해서 속삭였다고 했다. 그 말을 입속에 머금고 천변길을 걷던 다른 어느 날 오후, 그 문장이 이상할 만큼 낯익다는 사실을 별안간 깨달았다. 그건 내가 몇 달 전까지 『소년이 온다』를 고쳐 쓰며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었던 5장에서, 투병중인 성희 언니를 향해 고문생존자인 선주가 건넸던 말과 정확히 같은 것이었다. 죽지 말아요
"흰"의 작가의 말 중에서
교보eBook에서 자세히 보기: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8954651134
작가의 인터뷰를 보던 중, <소년이 온다>를 쓰고난 뒤 조금 밝은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사실 작가가 태어나기 전에 언니가 한 명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바깥에 나오자마자 죽었다고 했다. 마치 작가는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이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죽은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흰>에서 흰색은 맑고 깨끗하면서 순수한 색으로 느껴지고, '시작'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하지만 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를 흰색으로 덧칠하여 가리는 것과,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던 도시를 다시 재건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봐서 딱히 순수하지만은 않다.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저 겉에만 가리기 급급할 수도 있다. 그리고 흰색에 빨간색을 띠는 피를 자주 언급한다. 아무리 고고하려 해도 결국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책이 밝은 편에 속하냐면,... 나머지 책들이 너무 직접적으로 폭력적이다. 오히려 <흰>은 삶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 이유가 없어? 그럼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살아.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살아. 모두 아파하면서 사니까 같이 보듬어 나가면서 살자. 어쩌면 작가는 우리의 삶은 순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과거의 아픔을 덧칠하면서 재건하면서 이겨내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 것 같았다. 그러니 모두를 딱하게, 가여이 여기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던 것 같다.
작가가 자주 표현하는 하얀 개, 하얀 옷 위에 남겨진 핏자국, 배냇향이 배인 아기, ...등이 있다. 한강 작가님 소설을 읽으면 마치 소설이 아니라 산문시같다. 필자는 평상시 시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요며칠 동안 작가님 작품읽으면서 시를 아주 많이 접한 것 같다.
인간은 폭력과 잔인함을 가질 때도 있지만, 인간은 또한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 있을 때도 있다. 어쨌든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기에 어쩌겠나? 이러나 저러나 품어야지! 이제 마지막 책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차례다. 이제... 정말 준비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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