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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 Prisa, Sin Pausa
그냥, 책

[원작 후기] 이민진, <파친코> 고생은 여자의 운명이다

by 조잼 2024.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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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images.app.goo.gl/rjA5C9xRaUQW6MAv6

 

 벌써 <파친코>만 3번째 포스팅이다. 아마 내년 혹은 내후년에 애플티비 시리즈 <파친코> 시즌 3가 나온다면, 4번째 포스팅을 또 쓰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는 애플티비 시리즈가 아닌, 오로지 원작을 위한 포스팅을 한 번 담아보려 한다. 파친코를 N회독을 하면서 느꼈던 점을 털어놓고자 한다. 

 

노아와 모자수
선량한 조선인과 불량한 조선인

노아는 조선인들이 더 열심히 일하고 행실을 올바르게 해서 높은 지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모자수는 못된 말을 하는 사람들을 그냥 다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노아는 이삭처럼 '선량한 조선인'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어떤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성함을 유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선량"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을 뿐 누가 뭐래도 한수와 같은 캐릭터다. 한수가 물불 안 가리고 높은 지위로 올라가고 싶었던 것만큼 노아 또한 높은 지위에 올라간 사람만이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권력과 서열이 존재한다는 이치를 깨달았겠지. 

 그에 반해 모자수는 고한수처럼 부자가 되고 싶었다. 부자가 돼서 엄마와 작은 엄마, 할머니를 호강시켜드리고 싶었다. 그 '부'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우위에 서고 싶은 마음은 딱히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조선인이라고 무시하는 일본인들을 두들겨 패는 모자수를 보면 '불량한 조선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모자수는 오히려 이삭처럼 강직했다고 생각한다. 

 

노아는 왜 자살했을까?

난 평생 일본인들한테 내가 조선인 핏줄이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조선인들이 화가 많고 폭력적이고 교활하고 속임수를 쓰는 범죄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요. 평생 이런 소리를 견뎌야 했어요. 난 백이삭처럼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했어요. 절대 목청을 높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이 핏줄은, 내 필줄은 조선인 핏줄이에요. 게다가 이제는 내가 야쿠자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내가 어떻게 하든 절대 이 피는 바꿀 수 없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어요. 어떻게 내 삶을 망칠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리 경솔할 수가 있죠? 어리석은 엄마와 범죄자 아버지라니. 난 저주받았어요.

 

 노아는 한순간도 '백노아' 그 자체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항상 전형적인 조선인 캐릭터에서 상위버전으로 거듭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무리 진흙탕에서 자라왔어도, 고고한 연꽃이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고한 연꽃으로 봐주지 않았다. 좀 잘 하면 연꽃, 좀 실수하면 진흙탕에 있는 생명체. 모 아니면 도인 사람들의 잣대. 처음에는 조선인이라는 편견을 지우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노아가 사랑했던 아키코(노아 와세다 대학 시절 여자친구)는 노아를 "만나주는", "남들보다 열려있는" 일본인으로써 자부심을 가졌다. 노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고, 어떤 삶을 지향하고,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저 똑똑한 조선인, 엘리트 조선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아키코 또한 자신을 채우기 위해 노아를 이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아는 고한수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와 그렇게 엮이고 싶지 않았다. 선량하진 못할지언정 불량하고 싶진 않았다. 노아가 본 고한수는 야쿠자 그 자체였고, 아키코 또한 조선인이 저렇게 돈을 많이 벌었다면 야쿠자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고한수는 야쿠자가 맞았긴 했지만..ㅠ) 고고하고 신성한 사람이 되고 싶은 노아에게 고한수는 치명적인 진흙탕이었다. 그리고 본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백이삭'인데, 본인 스스로에게서 '고한수'의 면모가 보일 때면 얼마나 소름이 끼쳤을까?

 노아는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파친코에서 일하게 된다. 아마도 영어 선생님이 되려면, 학업을 끝마쳐야 했고 그 돈을 고한수로부터 받아야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인으로 속이고 선생님을 하려면 신분 증명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는 수없이 파친코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곳 사정 또한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을 고용하고 싶어했다. 신분 증명은 안 해도 되니, 이렇게 파친코 업장에서 일본인 신분으로 일을 하고 결혼도 하게 된다. 

 일단 노아는 싹수부터 틀려먹었다. 아예 가족을 만나게 되면 자살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본인과 결혼할 때, 아내의 아버지가 자살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결혼하기를 기피한다. 노아는 진정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인과 결혼해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만만한 상대를 고른 것이다. 자살한 가족을 둔 나머지 가족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 지 알면서도 그녀를 선택하여 미래에 자살할 준비를 단단히 한다. (사무실 서랍에 자살을 위한 총을 준비해뒀다.) 아내가 이미 '자살'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테니 두번은 상관없다고 생각했을까? 

 한수는 선자가 노아를 만나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노아가 자살했을 때 이미 예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노아는 '조선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선자의 가족이 '일본인'으로 사는 자신의 모습을 들킨 것은 너무 수치스러울거라 생각이 들었다. 고고하고 신성한 자태로 사는 일본인 노아, 하지만 본질은 조선인이므로 조선인 가족들에게 이 모습을 들키면 너무 부끄러웠겠지? 그렇다고 아예 조선인이라는 것도 잊을 순 없었다. 노아는 해마다 이삭의 묘에 가서 인사를 했고, 어머니께 일정한 금액을 달마다 부쳤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한수를 빼다 닮았다. 한수 또한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선자와 식구들(전부 조선인)을 츤데레같이 도와왔다. 

 노아의 자살은 이미 바로 앞에서 하루키가 조사하고 있는 조선인 중학생의 자살을 토대로 예상된 일이었다. 실제로 이민진 작가는 재일교포 중학생의 자살을 기사로 접하고 충격받아 <파친코>라는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꿋꿋하게 자신의 민족성을 버리지 않고 혹은 버리더라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선자는 과연 운이 좋았을까?
선자와 경희는 끝내 본질을 잃지 않은 강인한 여성들

이삭은 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고통받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이삭은 다른 이들이 고통받을 때 결코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왜 선자는 고통을 피했는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ㅇ르까? 선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수많은 사람이 고국에서 굶주리고 있을 때 선자는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 부엌에 있을까? 이삭은 하나님에게 계획이 있다고 말하곤 했고, 선자는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두 자매 생각을 하니 그 말이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두 자매는 선자의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보다도 더 천진난만했다. 

 이삭의 말은 우리는 다른 이의 가장 힘든 때를 보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나도 가장 힘든 때가 있었는데 어떻게 극복해서 지금의 삶을 살았을수도 있고, 아직 그 가장 힘든 때가 다가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힘든 일을 당하지 않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 때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삶에 대해 들을 때는 하나의 사건으로 마무리가 되지만, 내 삶은 흘러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지금 가장 힘든 때를 겪을 때, 다른 이의 삶이 편안해 보인다면 그것 또한 섣불리 판단하면 안되는 것이다.

 선자는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녀는 운이 좋다기 보다, 우선순위를 인지하고 그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나아갔기에 불행을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노아의 실종과 자살처럼 잊을 수 없는 상처도 있었다.) 선자는 조선인으로써 민족성에 대해 딱히 고려하지 않았다(즉, 독립운동, 공산주의, 자이니치 차별 등에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편이 아니라는 의미). 그저 자식새끼들 건강하게 잘 키우고 싶었다. 그렇기에 선자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일본이라는 땅에서 김치를 팔고, 장아찌를 팔았다. 그리고 고한수의 도움을 절대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자식을 위해서 고한수에게 가서 부탁도 한다. 자존심을 부려야 할 때와 자존심을 부리지 않아야 할 때를 아는 여인이었다. 일단 우리가 살아 남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선자가 이런 본질을 갖고 있었기에, 한수는 자신에게 없는 모습을 선자를 통해 만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선자와 계속 함께 있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선자 뿐만 아니라 경희도 또한 아주 강인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사랑이 뭔지 아는 사람이었다. 김창호에게 끌렸던 것도 사실이고, 김창호와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 이끌림이 아니라, 시간과 애정으로 쌓아올린 가족애와 의리라고 생각한다. 아마 경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경희는 지아비인 요셉을 외면할 수 없었다. 요셉이 백마 탄 왕자는 아닐지라도 경희와 선자의 식구들에게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을 했고, 기여한 만큼 돌아오지 않아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스스로 많은 상처를 받아왔던 사람이란걸 안다. 그리고 경희는 요셉과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 친구이자, 남편이자, 부모같은 요셉을 저버리는 일은 사랑이 아니다. 한편, 김창호가 조국에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이념을 위해 싸우러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존중하며 보낸다. 떠나지 말라고 하고 싶고, 곁에 남길 바라지만 다른 방식으로 창호를 사랑(존중)한 것이다. 경희에겐 선자의 어머니, 선자의 자식들 또한 자신의 가족이었다. 자신 혼자 살아남는 것은 의미가 없었고, 모두가 이 세상을 잘 버틸 수 있도록 선자의 곁을 지켰다. 이 또한 경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적이고 시끄러운 사람들
조선인 그리고 여인들

 

 왜 조선인들은 감정적이고 시끄러울까? 왜 여자들은 감정적일까? 이 책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전형적인 평가나, 여자들에 대한 전형적인 평가가 비슷하다. 감정적이고 시끄럽다. 기본적으로 우리 마음 속엔 고고한 인간들, 즉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우아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가 처음부터 감정적이고 시끄럽고 싶겠는가? 조선인들은 조선에서도, 타국에서도 일제 치하에 차별과 억압 때문에 너무 억울할 일이 많았다. 즉, 한이 맺힌 사람들이다.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선비같은 자태를 바란다는 것이 웃기는 일이다. 심지어 선비 출신이었던, 요셉도 처음에는 고고했지만 나중에는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인생이 고고하려면 그만큼 환경이 받쳐줘야 하는 것이다. 

 그럼 여자들은 왜 감정적이고 시끄러운 것일까? 당연하다. 중요한 일들은 남자들이 다 맡는 것처럼 대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일은 여자가 한다. 돈을 벌어오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떻게 관리를 하느냐도 중요하다. 어떤 여자들은 본인이 돈을 벌어오기까지 해야 한다. 아무도 이 상황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고, 스스로 해야 한다. 집안을 케어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잠자리 상대도 해야 하지, 남편 바람날까 단도리도 잘 해야 한다. 이렇게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남자의 선택으로 흘러간다. 듣기만 해도 억울하다! 

 그 우위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상대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이해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감정적이고 시끄러운 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절제할 줄 모르고, 교육을 덜 받은 어린 아이 정도로 재단한다. 

 


 조선인들은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굳이 돈을 벌려면 야쿠자가 되어 파친코를 운영하는 것 정도가 가장 잘 나가는 것이었다. 일본인들 생각에 파친코는 도박업장이기 때문에 고고한 일본인들이 하기 보다는 불량한 조선인들이 하는게 이미지상 보기 좋다고 생각했을까? 그렇게 조선인이 돈 버는 걸 못마땅했지만 파친코 정도는 인정해주는 분위기?

 불량한 조선인 답게 모자수는 파친코에서 일했지만 그는 항상 정직했다. 선량한 조선인은 못 됐지만, 평범한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했던 노아 또한 파친코에서 일했다. 파친코는 어쩌면 다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공간의 상징적 의미이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유리천장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 시즌3가 나올 때쯤 한 번 더 파친코 원작을 또 읽을 것 같은데 그 땐 나의 감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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