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프랑수아즈 사강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생각나는 작품이었다. 영혜는 처음에 꿈을 꾸고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부하다 나중엔 마치 식물이 된 것처럼 꽃이 된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야기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본능에 의존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마지막 장엔 나무가 되고 싶어했다. 내 생각엔 그저 흙이 되어 이 땅에 자리잡고 싶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 큰 어른이 되었지만, 점점 어린아이처럼 본능에 의존하고 싶어하며 훗날엔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싶기에,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영혜(단순 채식주의자가 아닌 영양가를 모두 무시하고, 주변 사람과의 서열, 계급, 위치, 분위기에 따른 사회화된 모습을 위선적이라고 생각하는)를 각 3명의 시점에서 볼 수 있었다. 첫번째 '채식주의자'는 남편의 시점이고, 두번째 '몽고반점'은 형부의 시점, 마지막 '나무 불꽃'은 언니의 시점이었다. 3명의 시점에서 어느 하나 영혜의 진짜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그저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마지막 언니의 시점에서 영혜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앞서 두명의 시점에선 영혜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고깃덩어리 자체로써 영혜를 지켜볼 뿐이다.
채식주의자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 명의 시점은 모두 그 날을 떠올리고 있다. 영혜가 가족들이 다 모여있는 집에서 고기를 거부하고, 장인은 사람들 앞에서 폭력을 행사하며 그녀의 입에 탕수육을 짓이겨 넣는다. 각기 다른 시점에서, 남편은 응당 받아야 하는 체벌이라고 생각했고, 형부는 자신의 예술 지향점을 완전 뒤바꿀 수 있는 전환점이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그 때 일을 좀 더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점에서 후회를 했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가 튜브를 거절하는 모습을 보며 이번에는 확실하게 말렸다.
채식주의자
남편의 시점 (역겨움 ⭐️⭐️⭐️)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아내의 입술에 장인은 탕수육을 짓이겼다. 억센 손가락으로 두 입술을 열었으나, 악물린 이빨을 어찌지 못했다.
마침내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인이 한번 더 아내의 뺨을 때렸다.
"아버지!"
처형이 달려들어 장인의 허리를 안았으나, 아내의 입이 벌어진 순간 장인은 탕수육을 쑤셔넣었다. 처남이 그 서슬에 팔의 힘을 빼자, 으르렁거리며 아내가 탕수육을 뱉어냈다. 짐승 같은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졌다.
<채식주의자> 중
처음 남편의 시점에서 읽었을 때, 나는 기묘하게도 납득이 됐다. 두번째 남편의 시점에서 읽었을 때, 남편이 폭력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회독에서 느낀건 과분한 것은 애초에 바라지 않는 태도에서 본인의 주제 파악을 잘 한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부부동반 모임 자리를 나갔을 때, 브래지어를 차지 않고 나갔을 때도 대리수치심을 느꼈다. 남편의 욕정을 받아주지 않을 때도 남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내가 처음 읽었을 때 내가 남편의 입장에서 공감을 했던 이유는, 남편 시점으로 서술했던 것도 있었지만 나는 지극히 이런 폭력과 억압이 있는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증거였다. 다 저렇게 사는거 아니야? 아내가 이상한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2회독에서 내가 느낀 것은 철저히 아내의 입장을 상상하면서 읽어보았다. 남편은 과분한 것을 애초에 바라지 않는 면에서 전혀 특별하지 않은 여자인 아내를 택했다. 그는 어디에서나 주제파악을 잘했다는 것은 자신의 서열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고, 아내는 자신보다 낮은 서열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채식주의자>편, 남편의 시점에서 아내의 이름을 스스로 불러본 적이 없다. 항상 아내, 아내, 아내... 아내가 꿈을 꾸고 육식을 거부하며, 집안에 온갖 가죽들을 다 갖다 버리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묻지 않는다.
오로지 식모 혹은 잠자리 해주는 상대 그 이상 그 이하의 역할을 바라지 않는 태도는 영혜를 고깃덩어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1,2,3부작을 모두 보면 알겠지만, 처음부터 영혜가 미쳐가는게 아니었다. 자신이 계속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해왔던 폭력들의 잔상이 괴롭혀서 붉은 피로 얼룩진 생명들을 거부하면 꿈을 덜 꾸지 않을까 희망을 가졌었다. 그런 와중에도 남편 아침밥은 꼬박꼬박 차려줬다. (일종의 반항으로 나름 채식 위주로 밥상을 차려줌)
남편은 영혜가 미쳐가든 말든, 부부 동반 모임에서 옷도 화장도 무난하게 하길 원했고 잠자리도 종종 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했을 때 못 이길 것 같은 대상인 장인어른, 처남에겐 얘기하지 않고 꼭 장모나 인혜에게 푸념했다. 당신네 자식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일침을 줬다. 아내가 장인한테 맞고 있는데, 맞아도 싸다는 식으로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못난 놈. 영혜가 계속 잠자리를 거부했던 이유는 고기 냄새가 아니라, 본인한테 강압과 폭력을 휘두르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굴복하기 싫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몽고반점
형부의 시점 (역겨움 ⭐️⭐️⭐️⭐️⭐️)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부모, 그것을 방관한 남편이나 형제자매까지도- 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다시 깨어난다 한들 그 상황이 변해 있을 리는 없다.
(...)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처제의 피비랜내가 코를 찌르는, 푹푹 찌는 여름 오후의 택시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위협했고, 구역질나게 했고, 숨을 쉴 수 없게 했다.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이 작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는 그때 했다. 단 한순간에 그는 지쳤고,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늘 올곧은 사람처럼 선을 넘지 않으려고 했다. 그 마음은 진정으로 세상의 수많은 폭력들을 마주보지 않고, 겉핥기로 미워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부 폭력들은 수용했던 것이다. 위의 사건 이후, 영혜에게 영감을 받게 되어 그 동안 본인이 해왔던 모든 철학과 예술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폭력이 난무한 환경에서 마치 신성한 처제의 태도를 보고, 그녀를 업어간 뒤 셔츠에 배인 핏자국을 보면서 영감을 얻은 듯 하지만 사실은 영혜의 몽고반점에 꽂혔던 것이다. 3부 <나무 불꽃>에서도 나온 장면이 있는데, 지우(인혜와 남편의 아이)가 몽고반점이 지워지지 않은 아이 시절에 영감을 많이 받았었다. 그러다 지우가 어기적 어기적 걷다가 어느 순간 다 커버리니 흥미를 잃었다. 성인이 된 영혜가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이 형부에겐 너무 자극적인 이야기였다.
그제야 아내가 온 것을 안 듯 처제는 멍한 얼굴로 이편을 건너다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영혜와 잠자리가 끝난 후, 그녀에게서 아이의 베냇저고리 냄새가 난다고 표현했다. 가장 아이일 때의 모습, 본능적일 때의 모습을 찬양하는 형부는 결국 처제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렸다. 마치 영혜가 뮤즈인 듯, 예술로 승화시킨 척 하지만 결국엔 성욕에 지배 당한 아랫배 나온 아저씨에 불과했다. 심지어 몽고반점에 꽂혀 이성을 잃었다는 것과 지우의 갓난 아이 시절을 찬양하던 말하는 꼴이 소아성애자같이 느껴질 뿐이다.
폭력에 대항한 영혜를 이해하는 척 했지만, 형부 또한 영혜를 잠자리를 함께 하고픈 고깃덩어리로 본 것이다.
나무 불꽃
언니의 시점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새된 고함을 지르는 그녀의 어깨를 보호사가 틀어쥐고 끌어낸다. 그사이, 담당의가 몸부림치는 영헤의 코에서 긴 튜브를 뽑아낸다.
가만히,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담당의가 영혜에게 고함을 지른다.
진정제!
수간호사가 주사기를 들어 건네려 한다.
하지 마......!
보고 있던 그녀가 울부짖듯 외마디 고함을 지른다.
그만! 하지 마! 하지 마세요!
그녀는 보호사의 팔을 물어뜯고 다시 앞으로 뛰쳐나간다.
뭐야, 씨팔!
보호사의 입에서 신음 섞인 욕설이 터져나온다. 그녀는 내쳐 달려가 영혜의 몸을 껴안는다. 영혜가 왈칵왈칵 토해낸 더운 피가 그녀의 블라우스를 적신다.
둘의 정사를 보게 된 인혜(영혜의 언니)는 둘 다 정신이 나갔다며 정신병원으로 신고를 했다. 남편은 정신감정을 받았을 때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하지만 영혜는 정신병원에 들어간 이후,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모든 가족들은 영혜를 외면했기에 어쩔 수없이 인혜가 그녀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론 영혜가 밉기도 했다. 원망할 새도 없이 저렇게 단단히 정신줄을 놔버리다니.
영혜는 1부, 2부의 남자들과는 달리 인혜를 처음으로 제대로 이해해보려 노력한 인물이었다. 1부의 남편은 그녀를 무시하고, 오히려 도구로만 쓰려고 했고, 2부의 형부는 그녀를 이해한 척 했지만 결국 도구로 이용한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3부의 언니 인혜는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 동생이지만 그녀를 품었고 결국 그녀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인혜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좋은게 좋은거다"며 사회의 순응하며 살아갔다. 남편을 그렇게 사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무난하겠다 싶어 결혼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떤 취향이 있는지 등등 본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사회에 맞춰나가서 무난하게 살아갔다. 하지만 영혜는 자신의 억압된 사회에 반항을 하고 있었고, 인혜는 그것은 외면한 본인이 비겁하다고 느꼈다.
인혜는 아버지가 억지로 탕수육을 영혜에게 먹인 날을 후회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말릴걸, 조금 더 인혜를 이해해볼걸, 남편을 그렇게 보내지 말걸, 제부를 좀 더 설득해볼걸,.... 이런 강압적인 장면은 3부 <나무불꽃>에서 영혜의 코에 튜브를 꽂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장면과 겹쳐진다. 그리고 인혜는 그 날 좀 더 적극적으로 말렸다. 2부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피로 드문드문 셔츠가 물들었던 형부보다, 영혜 입에서 왈칵 토해낸 피로 얼룩진 인혜의 블라우스는 용기와 이해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영혜의 시점
잠재되어 있는 인간의 폭력성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1부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꿈 속에서 본인이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피철갑을 두른 끔찍한 꿈을 많이 꾸었다. 이런 악몽은 멈추지 않았고, 그 수많은 고깃덩어리와 피들은 폭력으로 얼룩진 자신의 죄책감이 무의식적으로 꿈을 통해 보여준게 아니었을까? (이 내용들은 키우던 진돗개가 손을 물자 오토바이에 7바퀴를 돌아 죽이고 개고기를 먹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씬에서 그녀가 당시 죄책감을 안 느꼈다는 것에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 한 편으로는 수많은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느끼는 자신을 가해자라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채식 시작한다기 보다 육식을 거부하는 쪽을 시도해봤다. 육식을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죽으로 된 아이템도 모두 버렸다.
어떤 노력에도 그 악몽은 계속 되었다. 나는 그 악몽이 계속 되는 이유는 가장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남편과 한 집에 살면서 참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남편을 떠났다면, 악몽이 금방 멈쳤을거라고 생각이 든다. 자신을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 남편과 살을 섞고 한 집에서 평생 살아야 하는데, 안 미치고 베기겠는가? 폭력의 가해자든 피해자든 그녀의 삶은 평화로워질 수 없었다.
영혜는 1부 마지막에서 덥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그 더운 느낌은 너무 갑갑하고 답답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잠에서 깨고 작은 동박새를 물어뜯었는데, 내 생각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 결국 살생을 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렇게 폭력에 대항하던 그녀가 꿈에서 깨자마자 가해자가 된 자신을 보니, 브래지어 하나 벗는 것으로 만족이 안됐겠지. 그녀는 웃도리를 훌렁 벗어버린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2부 <몽고반점>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던 영혜에게 이제 더 이상 고기를 먹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혼자 살게 된 영혜는 단촐한 살림으로 혼자 원룸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해도... 영혜는 여전히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형부가 나체에 꽃을 그려준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는 커녕,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꽃이 된 자신은 더 이상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는지, 형부와 일을 치르고 말았다. 결국 폭력을 대항하는 그녀였지만 결국 또다른 폭력을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눈빛을 하는 영혜는 마치 순수악이었다. '내 뱃속에서 올라온 얼굴'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쌓아온 폭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나, 내장이 다 퇴화됐다고 그러지, 그치.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영혜의 여윈 얼굴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세상은 바꿀 수 없고, 어느 사회나 폭력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면 된다. 그래서 3부 <나무 불꽃>에선 나무가 되고 싶은 영혜로 그려진다. 육식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서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정신병원 안에서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그녀를 거부한다! 여전히 어느 형태든 그 폭력은 남아있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극악무도하게 잔인한 장면은 없었지만, 명성대로 아주 역겹고 혐오스러웠던 몇몇 장면들이 있다. 폭력이란 끔찍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혀 있어, 때론 그게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때도 많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과 이해라고 생각한다. 나비효과같이 나비의 날개짓에 어떤 파장이 불러올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의도치 않았더라도 그 안에서 수많은 폭력과 상처가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감과 이해가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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