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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챠 영화 추천] <안나 카레니나> 2012년작 | 키이라 나이틀리, 주드 로 주연 | 1870년대 러시아 판 내로남불 스토리

by 조잼 202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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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괴로워하는 법이다

 

 



<안나 카레니나> 줄거리
결혼한 커플들이 읽어야할 필독서

 

 톨스토이의 대표 작품 <전쟁과 평화>를 읽고, 이 작가 진짜 미친거 아닌거 감탄에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그 수많은 인간상을 한 작품 안에 녹일 수 있으며, 실제로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캐릭터를 주옥같이 표현할 수 있었던건지! 그리고 중요한건 시대적 배경이 지금 100년 이상이 넘어가는 와중에,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일임이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의 감정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뜻은 스토리가 아주 세련됐다는 이야기지.

 하여튼 그렇게 톨스토이하면 이제 믿고 읽기 때문에 시작했던 <안나 카레니나>. 우연찮게 내가 결혼 준비를 하던 시기에 맞춰 접했던 책이었다. 어떤 이야기인지 알아보지 않았다(독자로써 어떠한 감동도 깨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평상시 영화든 책이든 절대 내용을 자주 찾아보지 않는다.). 근데 여기저기서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이나 문구를 인용하는 것을 많이 봤다.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이렇게 자주 인용하는 것일까?

 일단 원작 후기부터 말해보자면, "명불허전"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30대 여성이 읽어도 여전히 세련된 문체였다. 

 

안나, 알렉세이 그리고 브론스키 | 도파민 팍팍 도는 삼각 불륜 로맨스

 

 안나의 오빠 부부 내외는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오빠는 가정교사와 불륜을 일으키고, 안나의 새언니 돌리에게 상처를 주기만 했다. 하지만 돌리는 오빠와 헤어지지도 않을거지만, 상처받은 마음이 깊어 여전히 화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나는 돌리에게 오빠를 사랑한다면 그만 용서해주라는 말을 해서 부부를 다시 하나로 합치게 만들었다. 안나는 영 핸썸 앤 리치한 브론스키를 만나게 된다. 둘은 첫눈에 반하게 되었다. 하지만 안나는 아들 세료쥐아랑 남편 알렉세이가 있는 가정을 가진 몸이었다. 브론스키의 적극적인 구애를 뒤로하고 거절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 어째서 저이의 귀는 저렇게 생겼을까?
<안나 카레니나> 원작 중

 

  (원작에서는) 안나는 집에 돌아오니 다 늙은 남자가 보였다. (영화에서는) 훗날 브론스키의 아이를 출산한 뒤, 남편 알렉세이가 손가락의 관절꺾는 소리를 질려했다. 이미 영핸썸앤리치인 브론스키에게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데, 늙은 남편이 얼마나 혐오스럽고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리고 아무리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어떤 흠이 보이면 참을 수 없게 혐오스러워지는 순간이 있기도 한다. 이건 정말 자연스러운거지. 하물며 안나는 알렉세이와의 관계에서 권태를 갖고 있었다.

 

 

 자신이 브론스키를 버리고 알렉세이와 함께 계속 살게된다면 감옥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브론스키는 혈기왕성한 젊음으로 안나에게 온갖 열정과 사랑을 보여주며 그녀를 가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가정을 갖고 있고, 충분히 사회적으로 이목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알렉세이는 현실적으로 안나를 가지려고 했다. "네가 나를 떠난다면 사회적인 질타를 받을 수 있을거야.",  "이 사교계에서 견딜 수 없어질거야.", "다신 아들을 볼 수 없게 될거야." 등등.. 사랑에 미친 안나는 그런 이야기가 들릴리 없었다. 그저 날 별로 사랑하지 않는 이 늙은 남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레빈 그리고 키티 | 무난하고  정적인 로맨스

 

 레빈은 오래전부터 키티를 사모해왔다. 그는 귀족이었고, 영지도 갖고 있었지만 가진 것에 비해 검소한 삶을 살아가는 청년이었다. 장자가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형은 거부했고 자신이 물려받았다. 귀족이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사냥도 하고,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싶은 그런 청년이었다. 하지만 욕심났던게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키티였다. 키티는 안나의 새언니 돌리의 친동생이이다. 그녀는 갓 사교계에 입성하여 브론스키(안나의 내연남)과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었을 때, 레빈이 갑분 청혼을 했다. 키티는 너무 어렸고, 가장 처음으로 받았던 프로포즈였고, 아직 브론스키와 이야기가 진전된 것도 없는데 레빈의 청혼을 받기엔 뭔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 때, 시대상 여자가 결혼하는게 우리가 평생 가질 직업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선택을 잘하는 게 중요했다. 아마 키티는 레빈을 분명 좋아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인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당장 승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거절을 받은 레빈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키티는 브론스키와 썸을 타보기도 전에, 그는 안나한테 푹 빠져 키티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미 퇴짜를 놓은 레빈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은 미안하고, 브론스키와 결혼얘기가 오갔는데 잘 성사되지 않았음이 사교계에 소문이 나자 그녀의 명성에 흠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소문이 무성한 여자와 엮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키티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요양하러 친언니 부부 내외와 함께 레빈이 살고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갔다. 레빈을 키티를 극진히 대접했고, 그들은 그 때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레빈은 여전히 키티를 사랑했고, 키티는 그 당시 조건을 쟀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둘을 같이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레빈은 완벽한 귀족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나름 말못할 가정사가 있었고, 그가 가진 지위가 귀족일지라도 소작농들과 허물없이 농사를 지내는 수더분한 사람이었다. (원작에서는) 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앞에 선서하는 다른 커플들과는 사뭇 달랐을지도 모른다. 키티는 그런 레빈의 (레빈 스스로 생각하는)허물을 완전히 받아들였고, 그녀는 최선을 다해 함께 해쳐나가려고 노력했다. 


 나는 톨스토이가 참 대단한 것 같다는 생각을 레빈과 키티의 이야기를 전개할 때 느꼈다. 안나와 알렉세이는 참 많은 것을 가진 커플이었다. 안나는 이미 사교계에 들어갔을 때, 최고 인기녀였고 성대하게 결혼을 했다. 거의 사교계의 레전드라고 알려질만큼 그녀는 아름다웠고,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갔다. 안나는 계속 그런 명예(요즘말로 트렌디한 핫걸)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치만 알렉세이와의 삶은 너무 단조롭기 그지없었고 도파민이 돌지 않았다. 하지만 레빈과 키티는 죽는 날까지 서로의 건강과 안전을 기도하고, 그들은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 성적으로 이끌려 서로에게 중독이 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빠른 사랑에 대한 결말은 각양각색이고,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레빈과 키티를 통해, 서로의 허물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존중하며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 또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적 이끌림이 끝난 것이 사랑이 끝난 것이 아니다. 정말 서로를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서로의 일상을 같이 해쳐 나갈 자신이 생긴다면 그 때부터 사랑이 시작된 것임을 말하는 것 같았다. 

 

불륜의 결말
안나 카레니나의 변화

 

 영화에서 안나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철도 기술자가 불의의 사고로 기차에 깔려 죽었다. 안나는 마치 복선을 암시하듯 그 사람을 빤히 쳐다봤고, 그의 식솔들에 대해 걱정했다. 

 

https://www.disneyplus.com/ko-kr/series/candy-a-death-in-texas/oTyucXZ0qI4e

 

Watch Candy: A Death in Texas | Disney+

 

www.disneyplus.com

 

 남부러울 것 없고, 금전적/사회적/외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던 그녀의 삶에 자극적인 사랑이 찾아왔다. 나는 <안나 카레니나>를 보면서 '캔디 몽고메리' 사건이 생각났다. 캔디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가정을 가졌던 여성인데, 남편과의 일상이 지겨워 불륜남을 모집했다. 그러다 꽤나 맘에 들었던 불륜남의 아내를 도끼로 수십번을 내려치며 죽였다. 안나와는 다른 얘기지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자극이 필요하면 또 다른 자극을 찾아 헤매는 경우들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그렇게 브론스키와 살게 됐으면 남편과 이혼하고 잘 살 것이지. 남편이랑 이혼하면 사랑하는 아들 세료쥐아를 만날 수 없기에 이혼할 용기도 내지 못한다. 아들도 보고싶고, 브론스키도 같이 살고 싶고, 사교계에서도 대접받고 싶은 욕심도 있다. 하지만 할 수 있는건 오직 브론스키와 함께 있을 수 것 뿐. 

 자신에게 남은 것은 브론스키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마저 잃게 되면 자신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의부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잠자코 살았던 자신의 일상을 깼던 매혹적인 브론스키가 다른 여자라곤 못 꼬실까! 그래서 그가 일을 하러 나가도 계속 따라가고 싶어했다. 그가 나갈 때마다 빨리 들어오라고 전보를 부쳤다. 그녀가 매달리면 매달릴 수록 브론스키가 멀어질 것 같아, 그를 떠나겠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브론스키도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분명 교양있고 아름다운 여성의 상징이었는데, 브론스키와 함께 산 이후 매춘부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모든 아내들은 자신의 남편도 꼬실까 그녀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고, 모든 남편들은 그녀를 바라볼 때 우습게 생각했다. 남편은 이혼을 못해준다고 하고, 브론스키는 곧 자신을 떠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기찻길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래요, 그 여자는 당연히 끝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을 한 거에요. 그런 여자에 어울리는 죽음을 택했지요. 그 여자는 죽을 때도 얄궂고 비천한 죽음을 택했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남을 심판할 자격은 없습니다, 백작 부인. 그야 . 그사건이 부인께 대단한 괴로움을 드렸다는 것은 저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만."

 

 원작에서 브론스키의 엄마와 어떤 남자(이름이 기억이 안난다)가 한 대화 내용이다. 브론스키의 엄마는 안나가 아들의 인생을 망쳐 놓고, 심지어 자살까지해서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표현했다. 그 남자는 우리에게 남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고 얘기한다. 나는 안나가 죽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일 벌여놓고 집 나왔으면 보란듯이 잘 살길 바랐다. 혹은 아무도 모르는 곳을 가서 또 다른 남자와 살길 바랐다.

 

여성의 불륜은 특별하다?
사회적 질타가 남다른 부녀자의 불륜

 

 극 초반에 안나의 오빠는 가정교사와 바람이 났다. 남자의 바람은 대수롭지 않다. 자연스러운 것처럼 표현이 된다. 그저 불륜당한 부녀자만 불쌍하다는 동정이 생길 뿐이다. 이런 굴욕 또한 부녀자가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녀자가 바람을 피게 된다면,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당하는 것이고 그 남편은 주변에서 오히려 더 많이 챙겨준다. 이런 인식들이 자연스러운 것도 있는데, 재산과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건 오직 남자 뿐이라 이런 시스템이 갖춰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피우는 것, 내가 결혼을 한 사람 외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 등 이런게 어떻게 내 맘대로 될 수 있을까? 물론, 실제로 어느 과정까지 나아갔는지에 따라 죄질이 달라지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시시때때로 바뀌는 법이다. 힘준다고 해서 내 마음이 조절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책임과 이성을 갖고 버티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안나의 남편은 늙고 고지식하고 단물이 다 없어진 배나온 아저씨가 되었고, 몸 좋고 멋있는 브론스키가 안나를 책임진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성의 말을 듣고 싶겠냐고. 분명 안나가 잘못한 것은 맞다. 하지만 남자들의 바람을 가벼이 생각하듯, 안나의 바람 또한 그저 그녀의 인생처럼 여겨야 했다. 그럼 그녀가 죽진 않았겠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 가야 했다. 

 

 

이 세상에 불행한 인간을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이성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이성이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게 주어져 있는 것일까요?

인간에게 이성이 주어져 있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지요

 

 원작에서 이성이라는 말을 몇번이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에 남아서 한 번 적어봤다. 당연히 이성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이성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에겐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남는 것이다. 

 


 

 영화는 연극처럼 장면 전환을 했다. 정신없이 바뀌는 장면 전환이었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꽤 긴 장편 소설이었고 여러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연출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품으로서는 정말 좋았으나 좀 지루했다. 

 

 영화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친남매로 <안나 카레니나>에서 만났다. 다아시.. 왜 이렇게 아저씨 된거야... 뭐, 저 영화 볼 때도 그렇게 멋있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 세월이 무색했다. 반면, 키이라 나이틀리는 러닝 타임 내내 감탄을 자아내기만 했다. 와인같은 그녀.... 안나 카레니나가 왜 삼각불륜로맨스를 일으켰는지 납득이 갈만한 비쥬얼이었다. 인정바리.

 

사진출처: Film Grab
https://film-grab.com/2015/01/13/anna-karenina/
 

Anna Karenina

[Joe Wright • 2012]

film-gr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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