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26. 10:55ㆍ그냥, 책
<파과>는 이미 2023년에 재밌게 읽었는데 독후감을 안 썼지 뭐람? 그래서 2025년 영화화가 되어 개봉까지 된 기념으로 다시 읽고 독후감을 한 번 써봤다. <파과>라는 작품은 60대의 킬러 여인의 마지막 미션에 대한 이야기다. 2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와 지금 다시 읽었을 때와 똑같은 감상평이 나왔다. 문장 한 줄, 한 줄이 너무 섹시해! 심지어 <파쇄>는 2023년 쯤에 나온 조각이 류에게 훈련받던 시절을 쓴 비하인드 스토리다. 구병모 작가님이 뭘 좀 아시네... 이걸 어떻게 안 읽을 수가 있냐구.
일단 킬러물은 대부분 비슷하긴 하다. 넷플릭스 시리즈 <길복순>을 봤을 때, 엥... <파과> 베낀거 아냐? 싶기도 했다. 그리고 <파쇄>의 류가 조각을 훈련하는 과정에서 <킬빌2>의 '파오메이'가 '베아트릭스'를 훈련하는 과정들이 연상되기도 했다. 어쩌면 여성 킬러에 대한 서사는 흔하디 흔할 수도 있다. 다만, 얼마나 강렬하고 섹시하게 풀어내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대놓고 누군가와 사랑하면서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텍스트나 장면에서 보여지는 끈적끈적함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 류와 조각
—이거 소질 있네.
순간 소녀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서 류를 올려다보았는데, 류는 지금을 무마하기 위한 판에 박힌 위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를 칭찬이라도 할 것처럼 감탄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화려하게 난장판을 만들어놨다면 죽을 때까지 때려줬을 텐데. 이모네 숙소에 짐이 얼마나 돼?
"파과"중에서 교보eBook에서 자세히 보기: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1162203621
"이거 소질있네." 이 한마디가 조각을 킬러로 만들었고, 그 소리 한 번 더 듣겠자고 류의 훈련에 진심으로 임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를 줄타기하는 듯한 그런 팽팽한 긴장감들이 너무 좋았다. 조각은 류에 대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에 대해 조(류의 아내)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류도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게 육감이 발달한 사내가 그 정도 기류를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다. 철저하게 조각을 이용한다기엔 조각을 또 너무 아꼈다.
# 투우와 조각
그녀는 투우의 눈을 감긴 다음, 역시 무심코 중얼거린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파과"중에서 교보eBook에서 자세히 보기: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1162203621
투우는 조각에게 집착을 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무참히 죽였던 단기 파견 가정부였던 손톱(조각의 젊은 시절 닉네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집착했다고 보기엔 그의 기억은 뭔가 사랑에 빠진 소년이었다. 자주 학회에 나가 집안을 거의 보살핀 적이 없는 엄마는 파출부를 의뢰했고, 아이가 알약을 잘 삼키지 못하니 가루로 빻아서 주라고 부탁하면서 떠났다. 손톱은 투우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그 집안에 들어왔으면서도 몇날며칠 투우에게 가루로 잘 빻은 약을 건네 주었다. 손톱이 투우의 아버지를 무참히 죽이고 사라지기 직전, 투우는 그녀의 진주색 등을 보았고, 그 날 이후로 그녀를 찾아 헤맸다. 그녀의 닉네임은 손톱에서 조각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장면은 <킬빌1>에 나왔던 장면이 생각이 난다. 베아트릭스가 자신의 아이와 남편을 죽인 5인 중 버니타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버니타의 딸 니키는 엄마가 살해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베아트릭스는 언제든지 커서 자신에게 복수하러 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며 이야기를 했다. 니키가 커서 복수를 하게 된다면, 투우처럼 집착과 애증으로 변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투우는 조각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조각은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게 되었고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라고 묻는다. 투우는 조각이 자신의 가족을 무참히 살해했다면, 시시한 킬러이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랐을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서 지금 당신에게 왔는지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투우의 죽음은 꽤나 명예로웠다.
# 강 박사와 조각
미안합니다. 그건 나 때문입니다. 내 눈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눈으로 심장을 흘리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실은 나 자신도 왜 그것이 표적이 될 만한 이유인지 켯속을 모르겠지만 놈은 그게 불만이랍니다. 조각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침착하게 약속했을 뿐이다
"파과"중에서 교보eBook에서 자세히 보기: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1162203621
처음에 조각이 강 박사에게 자꾸 눈길이 갔던 이유가 자신이 해외로 입양 보낸 아이라는 생각에 핏줄이 땡기는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이건 내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모성애라는 편견때문이었다. 60대 여성 노인이라면, 30대의 남성을 이성으로 바라보지 못할 거라는 나의 편견때문이다. 내 생각엔 조각은 강 박사에게 대놓고 끌렸다. 그 감정을 숨긴다 한들, 그를 응시했던 눈은 계속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투우는 그것을 질투한 것이다. 투우는 그런 끈덕진 관심을 본인이 받고 싶었고, 강 박사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투우가 나이 차이 너무 나지 않냐고, 누군가를 좋아할 자격이 있는거냐고(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기에) 대놓고 타박하지만 조각은 변명도 못한다. 진짜 이성으로 끌렸던게 맞으니까.
이 세상에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웬만하면 N회독은 못 하는 편인데... 오랜만에 <파과>, <파쇄>를 읽어서 꽤 즐거운 주말을 보냈다. 특히나 영화화돼서 가상 캐스팅을 해야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니 더 재밌었달까? 근데 김성철 배우는 내가 생각했던 투우와는 이미지가 좀 달랐다. 나는 약간 원피스의 '상디'같은 이미지를 상상했었는데... 그래도 김성철 배우가 이 역할을 소화해줘서 좋았다. 여성 서사 위주의 영화나 드라마는 남자 배우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하여튼 하남자에 개꼴깝임).
구병모 작가 작품은 <아가미>, <위저드 베이커리>까지 열심히 읽었다. 이 분은 문맥 하나하나에 도화살이 끼었는지,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가 없다. 하여튼 독서하는 사람들은 <파과>와 <파쇄>를 읽어보는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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