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23. 08:38ㆍ그냥, 책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신 도담은 냉소에 빠졌다. 결국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소통보다 침묵을 더 신뢰했다. 심각하지 않고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었다. 자해와 같은 만남들이 이어졌고 외로움은 커져만 갔다. 쉽게 만나던 도담이 쉽게 떠나면 그들은 도담에게 무서운 사람이라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네가 제대로 된 사랑을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도담에게 천벌을 받을 거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담은 그 말을 비웃었다. 아무것도 모른서. 천벌이라면 이미 받았다.
<급류>는 어떤 이야기?
서울에서 진평으로 전학 온 해솔은 어느 날 사고로 물에 빠지고, 도담은 주저 없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보다 심각했고, 두 아이는 도담의 아버지 창석에게 극적으로 구조된다. 이 일을 계기로 해솔과 엄마 미영은 도담 부자와 가까워지고, 네 사람은 점점 가족처럼 얽히게 된다. 그러나 도담은 병원에 입원 중인 친엄마를 떠올리며, 이 새로운 관계가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담은 친구 희진을 통해 아버지 창석과 미영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고, 해솔과 함께 그들의 뒤를 쫓는다. 결국 그들은 계곡에서 벌어진 한밤의 비극을 목격하게 되고, 그 충격적인 사건은 도담과 해솔의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급류>는 상처로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운명 같은 사랑 이야기다.
도담 :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사랑



나는 사랑을 아직 제대로 정의할 수 없다. 여태까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순간의 설렘"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사랑 자체에 대해 심도있게 생각할 수 있게 된 작품들이 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게리 채프만의 <5가지 사랑의 언어>,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 그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감싸주는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나는 상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마음, 상대의 단점마저도 포용해줄 수 있는 마음, 상대가 무엇을 하든 그 자체로 추앙할 수 있는 마음,... 이런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내가 살면서 이런 사랑을 한 번 받아볼 수 있을지, 이런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태준이 걔는 좀 아니었어.”
“왜? 어땠는데?”
예지의 남자 친구가 물었다.
“‘네 어두운 그늘까지 사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랬댔지?”
예지가 목소리를 깔고 우스꽝스럽게 흉내 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 사람을 죽였더라도 편이 돼 주는 게 사랑이지.”
도담은 술잔을 들이켜며 해솔의 눈치를 살폈다. 예지가 해솔 앞에서 전 남친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사람을 죽였어도’ 운운하는 것도 거슬렸다.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도담이 예지에게 따지듯 물었다.
“뭐?”
“사랑은 이런 거지, 이건 사랑이 아니지, 하는 거 말이야. 네가 정말 해 보고 말하는 거야? 아니면 책에서 읽은 거야? 그걸 넌 어떻게 아는데?”
평소 예지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랑 예찬론자였다. 도담은 예지가 그렇게 사랑을 최고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직 사랑에 충분히 당하지 않아서라고 믿었다. 도담은 불행의 크기를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양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비교했다. 도담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이 가장 크고 가장 값졌다.
"넌 사랑을 안 믿나 본데, 난 사랑을 믿어.” 취한 예지가 아랑곳 않고 계속 말했다. “사랑을 믿는다는 게 대체 뭔데.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도담도 지지 않았다. “내 말은, 음…… 사랑이 무엇보다 큰 힘을 가졌다는 거야.”
그 큰 힘이 아빠를 정신도 못 차리게 바보로 만들어 급류에 휩쓸리게 했나. 오직 사랑만이 최고라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말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사랑은 종교나 다름없었다. 언제나 사랑만이 답이라는 허술한 교리를 가진.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랑을 믿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사랑스럽지 않겠지. 도담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아끼고 위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도담에게는 하늘을 나는 빗자루만큼 현실과 먼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어두운 그늘마저 사랑해줄 수 있는게 사랑인거고, 급류에 휩쓸린다 하더라도 같이 떠내려가는게 사랑인거고, 사랑은 무언가 눈을 홱 돌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건 분명하다. 도담은 평생 사랑한다고 약속했던 엄마 정미를 배신한 아빠에 대한 분노를 멈출 수 없었고, 언젠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는게 사랑이라면 믿지 않기로 했다. 도담은 그늘이 없는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었지만, 보통 사람처럼 사랑을 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도담은 너무 어린 나이에 아빠의 불륜과 죽음을 목격했고, 그 상황에 대한 죄책감과 가족의 배신, 사랑하는 해솔과의 이별, 엄마의 원망, 동네 소문들이 한꺼번에 다가왔던 것이다. 자해를 하면 그 고통으로 다른 아픔들과 잠시 거리를 둘 수 있었기 때문에, 옳지 못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었다. 도담은 해솔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사랑이 훗날 변할거라는 생각도 두려웠다. 그리고 이 평범하지 않은 관계에 미래가 보이지도 않았겠지. 도담을 감싸줄 어른이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 싶었다. 그나마 제일 가까운 엄마 정미는 도담에게 거리를 뒀고, 잠깐이나마 가까웠던 해솔의 할머니가 있었지만 해솔과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론은 도담의 친구 예지가 말했듯이 사랑은 위대한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우리는 사랑때문에 죽고, 사랑덕분에 산다. 사랑때문에 다치고, 사랑덕분에 죽는다.
해솔 :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용서
사실 해솔은 급류에 떠내려 갈 뻔한 엄마 미영과 창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그들은 해솔의 플래시때문에 깜짝 놀라 급류에 떠내려갈 뻔 했던 것도 있었지만, 해솔은 그들을 구하려고 손을 뻗었다. 창석은 그 뻗은 손을 계속 잡고 있다면, 해솔마저 위험에 처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그의 손을 놓았다. 해솔은 그 둘을 위험에 빠뜨리게 한 것과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정미와 도담에게 남편과 아버지를 빼앗은 것 같아 또 용서받을 수 없다고 느꼈다.
사실 해솔은 엄마가 창석과 불륜 관계가 되었다고 해도 용서할 수 있었다. 해솔은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모질게 말하는 도담 또한 용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해솔은 회개를 하고 싶었던걸까? 창석을 따라 소방관이 되어 수많은 생명들을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구하러 다녔다. 그렇게 구하다 자신이 죽는다 할 지라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도담에게 자해를 하지 말라고 말렸으면서, 해솔 자신도 또 다른 방식으로 자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내 소감?
가끔 뜨겁고 질척대는 사랑이야기가 땡길 때가 있다
급류는 정말 이틀만에 술술 읽힐 정도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드라마에서 한 번 쯤 볼만한 소재의 자극적인 이야기? 사실 도담과 해솔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이야기를 흘러간다. 하지만 두 사람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고 있는 동안, 창석과 미영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입방정을 떨었던 희진은 10년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 뿐인가? 도담의 엄마 정미 또한 10년 동안 도담에게 미안했고, 해솔에게 모진 말을 뱉었던 것에 대해 후회가 남겨 있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원망도 서려있었을 것이다. 도담과 해솔이 잠깐 헤어졌던 사이, 둘은 연인이 따로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스쳐 지나갔다.
승주가 웃으며 도담을 바라봤다. 도담은 언젠가 승주가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 “그 왜 있잖아, 로맨스 영화 보면 주인공이 연인과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조연. 그게 내 팔자는 아닌 건가 싶어.” 도덕이나 약속으로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덮치는 일. 연인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그와 같은 일이 삶에서 또다시 반복되는 게 승주가 가장 두려워하는 불안이었다.
자신의 팔자랑 사랑에 심취한 나머지 결국 주변 사람들은 아파한다. 언젠가는 선화와 승주도 주고 받는 사랑을 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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