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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 Prisa, Sin Pausa
그냥, 책

<고래>, 천명관 | 불쾌하고 저질스러운데 헤어나올 수 없었다.

by 조잼 2025.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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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보문고

 

여성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전부 여성 서사소설인 것은 아니다😅

금복을 중심으로 춘희, 노파, 애꾸를 통해 인간의 이상, 성공, 욕망, 고난들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체적으로 극을 이끄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처음에는 여성의 야망과 욕망, 그리고 연대를 다루는 소설이겠거니 했는데... 웬걸? 추잡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철저히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여성의 삶이었다. "너희가 아무리 노력해도 남자들은 너희를 함부로 대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금복이 훗날 남자가 되는 것 역시 작품 내에서 여성으로서의 권력이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최고의 자리를 꿈꾸어도 패가망신할 뿐이라는 결말로 이어진다. 그러니 자폐아 춘희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면 후대에 가치를 인정받을 테니 슬퍼하지 말라는 듯하다.

물론 생물학적 성별을 제외하고, 이를 세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욕망, 복수, 업보를 다룬 소설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인 나로서는 그런 해석이 비겁하게 느껴진다. 남성 서사였다면 진부했을 이야기가 여성 서사로 쓰이면서 남녀 모두에게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여성 독자로서 수많은 강간과 성폭행이 사소한 문제처럼 다뤄지는 점이 불쾌했다.

이 소설의 여성 주인공들은 성폭력에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노파의 딸 애꾸가 애인에게 강간당했을 때, 노파는 배신 때문에 애인을 죽였을 뿐 성범죄에 대한 응징은 아니었다. 금복은 반복되는 피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춘희는 잔혹한 성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지만 이는 서술에서 순간적으로만 다뤄진다.

 

'고래', '점보' 그리고 '벌'

천명관의 소설 *<고래>*에서 '고래'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욕망과 꿈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금복이 처음 평대에서 고래를 본 순간, 그녀에게 고래는 단순한 생물이 아닌 그녀의 삶을 이끌어갈 욕망과 이상 그 자체였다. 따라서 이 소설은 금복이 고래(즉, 야망)를 잡기 위해 펼쳐지는 대서사적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고래는 단순히 욕망과 이상을 넘어 '남성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금복은 단순히 물질적 성공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에서 남성만이 누릴 수 있었던 권력과 사회적 주도권을 차지하고자 했다. 고래라는 존재가 남성성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어 속어에서 남성성을 비유할 때 흔히 '고래 잡으러 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금복은 자신의 고래를 잡고 싶었고, 이는 곧 남성으로서의 권력을 상징하는 은유적 욕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성공을 통해 남성적 권위의 정상에 오르고자 했으나, 결국 그녀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기에 남자의 자리를 완벽히 대체할 수 없었다는 한계를 직면하게 된다.

금복의 애첩이었던 수련 또한 진정한 남근을 가진 남자에게 돌아가면서 금복의 한계는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금복은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그녀가 남성성을 넘어서려던 시도는 결국 여자로서의 본질에 의해 좌절된다. 이러한 해석은 그녀의 야망이 결국은 불완전한 승리였음을 암시한다.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춘희는 뭔가 더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미처 입을 뗄 사이도 없이 둘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광대한 성간에는 희미한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꼬마 아가씨, 안녕.

코끼리, 너도 안녕.

 

이 구절은 금복의 이야기와 고래의 상징성을 넘어 기억과 존재의 의미를 짚어준다. 한 사람의 물리적 존재가 사라지더라도, 누군가 그를 기억한다면 그 존재는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물은 '고래'가 아니라 코끼리 점보다. *<고래>*라는 제목과 대비되게, 점보는 금복과 춘희의 삶에서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는다. 나는 점보가 단순히 거대한 동물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속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점보와 춘희의 관계는 한쪽이 떠나더라도 기억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사랑의 형태를 보여준다. 점보는 춘희가 그를 기억하는 한 계속해서 그녀의 곁에 있는 셈이다. 이는 금복의 야망과 고래가 상징하는 불안정하고 무한한 욕망과 대비되는 안정적이고 변치 않는 사랑의 상징으로 느껴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애꾸와 벌의 관계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애꾸의 주변을 맴도는 벌들은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도 지속되는 충성심과 보호 본능을 나타낸다. 벌들은 애꾸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곁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가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는 점보가 춘희에게 그랬던 것처럼, 벌들이 애꾸의 삶에 변하지 않는 존재적 지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전체는 자극적이고 때로는 불쾌한 소재들이 난무하지만, 점보와 벌들의 존재 덕분에 독자는 금복의 폭주하는 욕망과 파국 속에서도 안정과 위안을 찾을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금복의 대서사적 성공이 결국 허무와 비극으로 끝났을지라도, 점보와 벌이 상징하는 변함없는 사랑과 기억은 궁극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남긴다.

결국, *<고래>*는 욕망과 야망을 좇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면서도,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과 기억의 가치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래가 인간이 잡으려다 실패하는 이상과 야망을 나타낸다면, 점보와 벌은 잡으려 할 필요 없이 그저 곁에 머무는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고래> 후기?
불쾌해, 근데 멈출 수 없어.

사실 <고래>는 전지적인 작가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이 과정에서 시대를 아우르는 듯한 시각과 함께 구전설화 같은 독특한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작가는 사족을 마음껏 덧붙이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이 표현 방식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만약 이 소설이 1960년대에 쓰였다면, 그 시절의 사상과 배경을 고려해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고래>는 2004년에 발행된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허심탄회하게 본인의 여성관과 사회적 시각을 솔직히 드러낸다.

이러한 서술은 독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솔직함이 나쁘지 않다.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에 감명받았다면, 그것은 우리 시대가 여전히 그때의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또한, 작가 자신이 가진 가치관을 작품을 통해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현대의 여성들이 사회적 시선에 대응하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데 필요한 통찰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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