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에서 추천받았던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다고 들어 궁금해서 냉큼 사보았지 뭐람.
▶️ 작은 마음 동호회
(...) 증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과일청을 만들다가 시계를 보고 쫓기듯 자러 가는 사람들, 방안에서만 서성거리는 사랑스러운 지식인들이다. '현명한 엄마' '효부'라는 말에는 온몸을 긁으며 염증을 내지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보면 자궁에 통증을 느끼는, 그 통증을 속으로 삭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 우리는 바이링궐이다. 우리의 말들은 반쯤은 자신의 것이지만 반쯤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우리는 종종 싸우려다 싸울 대상을 변호하며 주저앉는다. 그러고 나서는 성나고 괴로운 마음이 되어, 자신을 때려 기어이 피를 내곤 한다. 아무리 싫어도 우리 입에선 자꾸만 '아줌마'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그 말이.
'작은 마음 동호회'는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대규모 집회에 참여하는 주부들의 모임이다. 사실상 그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뒤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둘씩 온라인으로 모이다가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마음>이라는 책까지 출판했다. 그렇게 출판을 도와준 사람은 경희의 옛날 친구 서빈이었다.
경희(화자)의 트위터에 서빈(주부들의 책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준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독립출판물 발행인)이 남긴 글이 있었다.
'너와 멀어진 건 아마도 네가 육아로 바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는지도 몰라. 나는 너에게 언제나 귀찮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남자 없이는 살지 못하는 친구들과 하나씩 멀어지면서 깨달은 건, 나는 사실 늘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것.'
경희는 서빈에게 "좋은 마음"으로 친절을 베풀었다. '너도 결국 결혼하고, 아이 가질거면서 특별한 사람인 척 했지만, 너도 우리랑 똑같다. 내가 결혼 선배로서 조언을 많이 해줄게.'라는 마음이 조금은 담겨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빈은 계류유산을 했고, 경희는 그렇게 고약하게 얕잡아봤던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집회 당일 여느 때처럼 모였던 '작은 마음 동호회', 그녀는 그곳에서 서빈을 마주쳤고 서빈은 그녀를 용서했다.
최근 들어, 나는 미혼과 기혼 사이에서 "나 혼자서" 팽팽한 긴장감으로 싸여 있다. 나는 독립적이고, 멋진 현대 여성이고 싶은데 "결혼"이라는 제도가 나를 의존적이고, 제약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이 소설에서 말한 것 처럼 나는 누구에게도 증명할 수도 없고, 그 누구도 관심이 없는 내 삶에 대해 자기혐오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들은 자신을 잃게 된다고 한다. 더군다나 아이를 갖게 되면 더 자기다워질 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결혼을 한다. 요즘 여자들은 자기를 잃을 수 없기에, 결혼을 안 해줄거고 희생하고 싶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지금 희생하고 있는 걸까? 나는 의존적이고 남자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인걸까? 여러개 다리 걸쳐놓지 말고 딱 하나만 정해야 하는걸까?
늘 삶의 무게는 상대적이지만, 인간은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그 누구도 폄하해선 안되고, 그 누구도 얕잡아봐선 안된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같았고, 같아질 것이고, 같다.
▶️ 승혜와 미오
동성 커플인 승혜와 미오, 승혜는 첫 직장으로 "베이비시터"로 일하게 됐다. 이 사회의 기준으로 봤을 때, 베이비시터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외모를 가졌지만 그녀는 아이를 사랑했다. 승혜와 미오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었지만, 그 있는 그대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자체의 유효기간이 슬슬 보이는건지, 서로가 원래 갖고 있던 모습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동성 커플이라고 다를 건 없다. 그저 서로 사랑하다보면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아지고,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다 알아줄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기도 한다. 언젠가 남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 이 불만들을 견디고 이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결국 이 순간들을 지나치기 위해서, 한 번의 고비는 넘어야 한다.
이래서 사랑에는 국경도, 성도, 종도, 나이도 없다는 것이다. 사랑의 형태는 그저 똑같다. 사회가 만들어 낸 번식의 의미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너무 말이 길어지므로 여기까지.)
▶️ 마흔셋
나는 언제나 내가 우선이었다.
뒷바라지도 2등 시민 노릇도 희생도 조력도 하기 싫었다.
독신으로 살고 있는 재경, 그리고 남자로 성전환 수술을 한 동생 재윤. 그들은 고아가 되었다. 재경, 재윤의 엄마는 내 맘같지 않은 자식들을 두고, 그렇게 조용히 병에 걸려 하늘 나라로 떠났다. 마흔 셋이 된 재경의 친구들은 모두 10년 전에 결혼해서 학부모가 되어 뒷바라지 하느라 바쁘다. 재경은 부모님 모두 여의고 자신의 일에 권태를 느끼고 있다. 결혼하면 달라졌을까? 결국, 재경은 가족에게 받았던 사랑,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 재윤이 있기에 오늘도 살아간다.
나는 인간은 사랑을 해야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낭만주의다. 꼭 결혼을 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대상,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 것만으로도 삶의 이유가 된다. 꼭 생명이 없어도 된다. 내가 사랑하는 일, 사랑하는 책,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두 자매... 아니 두 남매는 살아야하는 이유, 사랑할 대상이 아직 있기에 계속 살아간다.
▶️ 피클
혐오와 차별은 어디에나 있어서, 나 혼자 아무리 올곧게 살겠다고 마음먹어도 물들지 않기가 쉽지 않아요. 그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하죠.
그 짧고 뜨거웠던 정의감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해고, 퇴사, 명예훼손, 무고, 고소, 병원비, 리볼빙, 연체.... 같은 말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모두의 일이었다면 떠올리지 않아도 좋았을 말들. 선이나 . 악대신에 책임이라는 단어에 모두가 조금씩 연루되었음을 인정하고 그 단어를 나눠 가졌더라면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을 말들이었다. 그 차갑고 선명한 단어들이 차례로 머리를 후려쳤다.
유정은 일 잘하는 기자였는데, 편집장와 회사에서 스캔들이 돌았다. 유정은 어느 날 갑자기 퇴사했고, 선배 선우는 유정이 따로 보낸 이메일을 통해 진짜 퇴사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유정과 편집장은 실제로 가까웠던 것은 맞았으나, 유정은 편집장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놓았다. 선우는 유정의 편에 서고 싶었으나, 사랑과 폭력을 제 3자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답이 안 나왔다. 사랑을 폭력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확실한 피해자가 진짜 존재할 수 있을까?
편집장은 사실 오래 전에 선우의 인턴 시절에 성폭행을 했었다. 선우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선우는 유정과 편집장 사이의 진실을 파헤치기도 전에 그녀는 오래전부터 피해자였다. 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저 덮고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상한건지, 익은건지 모를 피클이 담긴 피클통을 열었을 때, 상한 것을 알았다. 확실히 상한 티가 난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지만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상한건지, 익은건지 알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유정의 편에 서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정, 재산, 경력 등 모든 것이 뒤흔들릴 수 있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맞을까? 이제와서 유정의 편에 서는 것이지만, 사실은 나의 일이다. 혹은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모른척하고 살 수 있을까? 그럼 내 피클은 익기는 커녕, 곰팡내 폴폴 풍기며 썩어있겠지? 그래서 선우는 자기가 진 빚이 많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계속 모른 척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살아온 삶들을 바라보며.
▶️ 이웃의 선한 사람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믿어야죠.
선한 마음은 선한 마음을 낳고, 그게 또다른 선한 마음을 낳으니까요.
주인공의 자식을 구해준 이웃 사람. 그는 주인공의 자식을 구해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주인공이 담배를 필 때 그 위에 식초를 부어버리기도 했다. 주인공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흡연자에게 꽤나 비참한 형벌을 내린 이상한 그 남자에게 보답을 꼭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리고기를 먹으러 이웃 사람과 함께 가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사람은 사실 미래를 본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이가 찻길에 뛰어들 것을 알고 구해줬다고 한다. 이웃 사람은 보답을 최대한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 주인공을 만난 이유는 어차피 미래엔 만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웃 사람은 미래를 보지 못 하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축복받은 거라고 말했다. 그는 미래만 볼 수 있고, 미래로 가기까지 수많은 잠재적인 과정들이 보이기 때문에, 그 과정들 중 하나를 자신이 골라 미래에 도달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어여쁜 아내를 만나 알콩달콩하게 살고, 자식이 또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다. 하지만 어떤 대형 참사로 인해, 손녀가 죽고 그에 죄책감을 가진 딸은 찻길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다. 그는 죽을만큼 괴로운 미래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번 소설은 좀 어려웠다.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도달하지 못한 느낌? 읽는 내내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책에선 미래를 바꿀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바꾸지 않은 것이고, 이 책에선 미래는 절대 바뀌지 않고, 이웃 사람은 그저 그 미래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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