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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월든, 대자연의 예찬과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불멸의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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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명상록>을 읽었을 때, 이 책은 내 삶이 고단할 때마다 보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나를 감싸주고 싶어 나를 치유한다면 <명상록>을 읽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감명깊게 읽었던 '소로처럼 보는 법'을 읽다가 <명상록>에 이어 <월든>이라는 책을 꼭 읽고 싶었다.
와... 근데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졸린 것이다. 나는 무조건 아침에 지하철을 탈 때, 철학 혹은 인문책을 읽곤 하는데, 소로의 '경제'파트로 시작했을 때, 너무 잠이 와서 진도가 영 안 나가는 것이다. 근데 나는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하는데, 이렇게 한 책이 진도가 안 나간다고 포기를 하게 되면 다른 책들도 계속 포기하게 될 것만 같아 한 번 고민을 해 보았다. 어떻게 하면 <월든>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까? 내 결론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 작자를 한 번 분석해보자는 것이었다.

# 경제

메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이웃과 2km 정도 떨어진 월든 호숫가의 숲에 손수 집을 짓고 2년 2개월을 살았다. 대부분 이 책을 쓸 때는 월든에서 살았지만, 이 부분은 문명사회로 돌아오고 나서 쓴 것 같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이유, 소로가 세상을 바라보았던 가치관 등이 엿보인다. '경제' 파트가 이 책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 한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 근처에 집을 지을 때, 단돈 28달러 12.5센트으로 집 뿐만 아니라 헛간까지 지었다. 소로는 농사까지 해서 농작물을 팔기 까지 했다...! 2년 2개월 동안 61달러 99.75센트를 지출하고, 이 금액을 충당하기 위해 농작물을 팔아 23달러 44센트를 벌었다. 물론 더 이득은 없었지만, 스스로 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면서 2년 2개월 동안 콩코드 마을 체험 및 자기 수양한 시간들을 따지면 꽤나 이득인 셈이다. 더군나가 여기 살았던 이야기로 지금까지 유명해지지 않았나?

내 가구는 침대 하나, 탁자 하나, 책상 하나, 의자 셋, 지름이 8센티미터쯤 되는 거울 하나, 부젓가락 하나, 철제 장작 받침대 하나, 솥 하나, 냄비 하나, 프라이팬 하나, 국자 하나, 세숫대야 하나, 포크와 나이프 두 벌, 접시 세 개, 컵 하나, 숟가락 하나, 기름병 하나, 당밀 단지 하나, 옻칠한 램프 하나가 전부다. 일부는 내가 직접 만들었고, 나머지는 비용이 한 푼도 들지 않은 것이라서 목록에 넣지 않았다. 아무리 가난해도 의자 대신 호박에 걸터앉아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없다. 만약 있다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일 것이다. 마을에 나가면 쓸 만한 의자를 다락방에 처박아둔 집이 한둘이 아니다. 의자가 필요하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가져오면 된다.

말인가? 똥인가? 돈이 없으면 남의 집에 들어가서 의자를 가져오면 된단다ㅋㅋㅋ 사실 소로는 형이랑 사립학교를 운영할 정도로 꽤 부유한 쪽에 속했다. 그리고 소로는 사업도 해봤고, 돈을 만져볼 만큼 만져봤던 사람이다. 연구를 하겠답시고 시골 마을로 내려와서 집 짓고 2년 2개월 동안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역시 철학은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래도 나름 소로는 자신의 의견일 뿐이지 각자의 인생을 살라고 간간히 조언해준다.ㅋㅋㅋㅋ(근데 마지막 ‘작품 해설’에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 자발적인 가난을 택하였음을 선포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지금처럼 소비를 지향하는 시대가 아닌 검소함이 미덕인 시대였다.)

나는 어느 누구도 내 생활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바라지 않는다. 더구나 그 사람이 내 생활 방식을 제대로 익히기 전에 내가 또 다른 생활 방식을 찾아낼지도 모를 뿐 아니라 가능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월든 호수 근처에 지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집,https://today.uconn.edu/2020/04/op-ed-walden-can-tell-us-social-distancing/

 

# 내가 살았던 곳과 거기에서 산 이유

내가 숲으로 들어간 것은 나 자신이 의도한 대로 삶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앞에 두고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생의 가르침을 온전히 익힐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고, 죽음을 맞았을 때 내가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삶이 너무 소중하여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만이라도 깊이 있게 살면서 삶의 정수를 고스란히 흡수하고 싶었다. 스파르타 사람처럼 강인하게 살아감으로써 삶이 아닌 것을 몽땅 물리치고 싶었다. 나는 뿌리까지 바짝 잘라 내어 구석으로 몰아가서는 가장 낮은 단계까지 끌어내림으로써 삶이 천박한 것으로 판명되면 그 적나라한 모습을 포착하여 세상에 알리고, 반대로 삶이 숭고한 것이면 직접 체험함으로써 그 사실을 깨달아 다음 여행기에 정확하고 충실하게 기술하고 싶었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 대부분은 인생이 아마의 것인지 신의 것인지에 대해 이상할 만큼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이승에서 사는 주된 목적은 "신을 찬양하고, 그 존재를 영원히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다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다.

소로는 자신의 삶이 너무나도 소중해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가 묘사한 월든에서의 첫날 밤은 보잘 것 없는 집이었지만, 아침 햇살을 맞이하면서 일어났을 때, 온전히 자연과 자신이 함께 공존했던 그 시간을 사랑했던 것 같다. 소로는 주변 사물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내가 월든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시대의 월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소로는 자신이 있었던 위치를 사진이 아닌 글로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되도록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개인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때 한 개인적인 일이 <콩코드강과 메리맥강에서 보낸 일주일>이라고 형과 함께 한 추억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월든>과 함께 상당히 유명한 소로의 책이다.

# 독서

소로의 집은 사색뿐만 아니라 독서하기에 딱 적합한 집이었다. 처음에는 콩밭을 일구느라 책을 읽을 여력이 없었는데, 틈틈히 여행기 한두 권을 읽다보니 이런 시시한 책을 읽으려고 이 삶을 살고 있나 싶어서 고전을 읽었다. 소로가 말하기를, 고전은 언제나 옳다.

문자를 배운 이상 우리는 최고의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 평생을 초등학교 4학년이나 5학년 학생처럼 교실 맨 앞줄의 가장 낮은 의자에 앉아서 알파벳이나 한 음절로 된 낱말만 되어서는 안 되잖은가. 사람들 대부분은 「성경」이라는 좋은 책을 읽거나 남이 읽는 것을 듣고 우연히 지혜가 담긴 글을 통해 자기 죄를 깨달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남은 생애 동안은 무기력하게 가벼운 읽을거리나 읽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허비한다.

소로가 뼈를 때린다. 아파 죽겠다. 솔직히 하도 책을 많이 안 읽어서 소로의 <월든>도 나한테 쉬운 책은 아닌데, 소로는 이것보다 더 어려운 책을 읽어서 인생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소로는 자신의 삶의 방식일 뿐, 따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솔직히 대부분 맞는 말이다. 책을 많이 읽어라! 이 것도 아니고, 질 좋은 책을 많이 읽어라! 이런 말인데, 현대 사회에 있는 사람들이 책을 잘 안 읽는 사실을 소로가 알게 되면 소로는 어떻게 반응할까?ㅋㅋㅋㅋ
소로는 언어 천재일 정도로 언어를 빠르게 습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하버드 출신이다. 뭐, 이 정도면 말 다 하지 않았나?

# 소리

콩밭을 일구느라 전혀 독서를 할 수 없었던 소로의 첫 번째 여름, 그는 쉬는 시간마다 공상에 빠졌다. 소로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며, 철도 소리에도 집중을 한다. 소로는 아시안 사람들이 명상에 빠지는 글을 읽었는지, 그 명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숲에서 깨우쳤다고 한다. 소로는 동물들의 울음소리, 주변의 소리로 시간을 체크하기도 했다. 소로가 소리를 들으며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소로의 집 주변에는 문명 세계로 통하는 길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 고독

이 부분을 가장 흥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가장 가까운 이웃도 2km가 떨어져 있는데다 소로의 집 중심으로 800미터 내에 어떤 집도 보이지 않았다. 광활한 땅을 혼자 차지하고 있었다. 소로는 딱히 외로움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딱 한 번 숲에 들어오고 나서 몇 주 지났을 때 가까운 곳에 이웃이 있는 것이 평온하고 건강한 삶의 필수 조건이 아닐까 하고 한 시간쯤 생각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대자연 속에 빗방울 소리, 집 주변의 모든 소리, 아름다운 풍경 등이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친밀감을 느끼게 해줬다고 한다. 자연이 곧 자신이고, 자연과 함께라면 늘 공존하고 있다고 깨달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어떠한 장소도 그에게 낯선 장소가 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나한테 말한다. "그곳에서는 무척 외로울 것 같아요. 비가 오나 눈이 내리는 날, 특히 그런 밤에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고 싶지 않나요?" 나는 이 사람들한테 이렇게 대꾸해 주고 싶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 전체가 우주에서는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측량 도구로는 저기 떠 있는 별의 너비를 측정할 수도 없는데 저 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사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내가 왜 외로울 거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사는 지구도 은하수 안에 존재하지 않나요? 당신이 던진 질문은 내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사람을 주변의 동료들과 분리함으로써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건 어떤 종류의 공간일까요? 두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인다고 해서 두 사람의 마음이 더 가까워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소로가 말하는 고독을 이길 수 있는 묘약은 무엇일까? 바로 '아침 햇살'이었다. 그는 아침에 햇살을 맞고, 그 것을 있는 힘껏 즐기다 보면 그 자연과 함께 하는 에너지로 모든 부정적 신호를 차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못말리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그래도 이 말에 꽤 신빙성이 가기 때문에 믿어 보려고 한다.

# 방문객들

내 집에는 의자가 세 개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한 것이다. 예기치 않게 많은 손님이 찾아왔을 때 내놓을 의자가 세 개뿐이지만 대게는 앉지 않고 서서 방을 효율적으로 잘 이용했다. 작은 집인데 얼마나 많은 남녀가 들어올 수 있는지 놀랍다. 나는 스물다섯에서 서른 명이나 되는 영혼을 그들의 육체와 함께 한꺼번에 내 지붕 밑에 들였는데, 너무 비좁아서 답답함을 느끼며 헤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진심으로요? 진심으로 그 좁은 집에 30명이 들어가 있었다구요...? 솔직히 대부분 야외에서 놀았겠죠...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의자가 세 개인 이유가 고독, 우정,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함이라는데.. 집 좁아서 세개 밖에 못 둔 것이 아닌지. 소로 엄청 멋있는 사람인데 가끔씩은 이런 생각들이 괜히 의미부여한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소로는 사람들을 대접할 때, 딱히 많고 푸짐한 음식들로 대접하지 않는다. 2인용의 빵만으로도 1000명도 거뜬히 대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면 소로의 손님들은 먹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닌가보다. 손님에게 내놓은 식사에 자신의 평판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진수성찬이 아닌 휴식이 진수성찬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2년 2개월 동안 꽤나 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했는데, 그 중에서 맘에 들지 않은 손님들이 있는데 돈 버는 데만 시간쓰는 사람들이나 개인주의적인 사람들, 내 말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전문직이 최고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지금 소로가 하는 일이 유익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등은 '인간 솔개'라고 불렀다.

# 콩밭

우드척

콩 덕분에 땅에 애착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안타이오스처럼 힘이 세졌다. 그러나 내가 왜 콩을 재배해야 했을까? 하늘만이 알 터였다. 내가 여름 내내 콩밭에만 매달린 것은 전에는 양지꽃, 블랙베리, 물레나물 같은 달콤한 야생 열매와 아름다운 꽃들만 자라던 땅에 콩이 자라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콩에서 무엇을 배우고, 콩은 또 내게서 무엇을 배울까? 나는 콩을 애지중지하고 김을 매주며 아침저녁으로 살핀다. 이것이 내 하루 일과다. 콩잎은 넓적하니 보기 좋다. 나를 도와주는 것들은 메마른 땅을 적시는 이슬과 비, 그리고 대부분 건조하고 척박한 땅이기는 하나 그 속에 남아 있는 영양분이다. 반면에 나를 방해하는 적은 벌레와 서늘한 날씨인데 무엇보다 가장 나쁜 적은 우드척이다. 우드척은 1000제곱미터 정도 되는 땅에 심은 콩을 깨끗이 먹어 치웠다. 하지만 나는 무슨 권리로 물레나물과 그 밖의 풀들을 쫓아냈고, 오래전부터 우드척들의 터전이었던 곳을 뒤엎었단 말인가? 어쨌든 남은 콩들은 곧 우드척이 갉아 먹을 수 없을 만큼 억세어질 테지만 점점 자라면서 새로운 적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소로가 심은 땅은 모두 대략 11km 정도 됐는데, 콩밭을 일구는데 힘도 들었지만 애착도 갖게 되었다. 콩을 키운다는 것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식량을 만드는 것이었고, 일구어낸 콩들을 팔 수도 있었다. 소로에게 애착을 가졌던 가장 큰 이유는 밭으로 쓰이지 않았던 땅을 자신의 힘으로 콩밭으로 만들었던 노동의 가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로는 2년 2개월 동안 자기의 땅으로 쓰면서 콩밭을 일구며, 우드척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했다. 소로는 이 땅을 빌렸다고 한들 그 땅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과 함께 공존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우드척이 콩을 먹어치우더라도 그들을 내쫓을 수는 없었다.

내가 콩의 씨앗까지 소중히 여겨 가을에 수확한다고 한들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겠는가?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보살핀 넓은 밭은 경작자인 나한테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나보다는 자기한테 더 친절하게 영향을 주는 것, 즉 자기에게 물을 주고 자기를 푸르게 하는 자연에 의지한다. 콩들이 자라서 결실을 맺지만 내가 다 수확하지는 않는다. 일부는 우드척을 위해 자란 것이 아닐까? 밀의 이삭(라틴어로 '이삭'을 가리키는 spica(스피카)는 원래 '희망'을 뜻하는 spe(스페)에서 speca(스페카)를 거쳐 파생한 말이다.)이 농부의 유일한 희망이어서는 안 된다. 낟알(라틴어로는 granum(그라눔)으로 이는 '낳다', '열매를 맺다'를 뜻하는 grendo(그랜도)에서 파생한 말이다.)만이 밀이 낳는 전부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수확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다. 잡초의 씨도 새의 먹이가 되므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 역시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밭에서 거둔 수확물이 농부의 헛간을 가득 채우느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진정한 농부라면 다람쥐들이 올해 숲에 밤이 많이 열릴지 아닐지를 걱정하지 않듯 수확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자기 밭에서 거둘 수확물에 대한 권리마저 포기한 채 첫 열매뿐 아니라 마지막 열매까지 기꺼이 제물로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하루의 일을 끝마칠 것이다.

 

# 마을

소로의 집에서 한 방향으로 죽 가서 반대편 지평선 너머엔 느릅나무와 플라타너스 숲 아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마을이 있었다. 소로의 눈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굴 앞에 앉아 있거나 이야기를 나누러 이웃 굴로 달려가는 프레리도그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 마을에선 각종 견과류와 건포도, 소금 등의 식료품을 팔았고, 사람들은 그 때의 핫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소식을 전하곤 했다. 소로는 그렇게 그 마을을 자주 가서 관찰을 하곤 했다.

같은 길을 수천 번 다녔어도 그 길의 특징을 모르면 시베리아의 거리처럼 낯설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물론 밤에는 당혹감이 훨씬 클 것이다. 가장 평범한 산책에서 우리는 비록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늘 잘 알려진 수로 안내인 같은 등대나 곶을 길잡이 삼아 방향을 정하고, 또 평소 다니던 항로를 벗어나면 근처의 곶이 어디에 있ㄴ는지를 항상 염두해 둔다. 그리고 길을 완전히 잃거나 한 바퀴 돌기 전까지(눈을 감고 한 바퀴만 돌면 세상에 대한 방향 감각을 잃게 된다.) 우리는 대자연의 광활함과 불가사의함을 인정하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잠에서든 몽상에서든 깨어날 때마다 나침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길을 잃고 나서야, 달리 말하면 세상을 잃고 나서야 자신을 찾으려 하며,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자신과 세상의 관계가 얼마나 무한한지 깨닫기 시작한다.

소로는 첫 번째 여름이 거의 끝나 가던 무렵, 세금을 내지 않았고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혐의로 체포당해 감옥에 갇혔다. 소로딴엔 이상한 사회단체를 가입하라는 강요에 의한 저항이라고 했다. 이튿날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서 숲 속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자연과 그의 삶을 더 즐기게 되었다.
처음 소로가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말이 선뜻 와닿지 않았다. 현대에선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소로가 세금을 내지 않았던 이유는 마지막 작품해설에 나온다. 당시 미국은 노예제도 폐지와 멕시코 전쟁으로 연일 시끄러웠다. 소로는 노예제도를 묵인하는 매사추세츠주 정부와 멕시코 침략 전쟁을 일으킨 미국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6년 동안 인두세 납부를 거부했다. 하루살이 감옥이었지만 이 경험으로 소로는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이라는 제목으로 ‘에스테틱 페이퍼스’ 창간호에 발표하였는데, 소로 사후에 <시민 불복종>이라는 에세이로 정식 출간되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시민 정부일지라도 이는 시민이 평화롭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며, 개인의 자유와 양심을 좌우할 권한은 조금도 없다. 개인의 자유와 양심을 저해하고 국가가 제멋대로 전쟁을 벌이거나 노예제 같은 비인간적인 폭력을 행사할 경우 납세 거부 등의 방법으로 저항하는 것이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라는 내용은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 루터 킹 같은 비폭력 저항 운동가 및 민권 운동가를 비롯해 시민 운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바이블이 되었다.

위의 인용문의 마지막 말은 참 좋다.
그런데 대부분 길을 잃고 나서야, 달리 말하면 세상을 잃고 나서야 자신을 찾으려 하며,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자신과 세상의 관계가 얼마나 무한한지 깨닫기 시작한다.

# 호수

월든의 경치는 아름답지만 다른 호수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라 웅장함과는 거리가 있다. 이 호수는 자주 찾았던 사람이거나 거주한 사람이 아니면 특별한 관심은 갖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소로에게 월든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묘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월든의 모든 특성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것은 순수성이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이 이 호수에 비유되었지만 솔직히 그런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는 이는 드물다. 벌목꾼들이 맨 먼저 기슭 이곳저곳을 벌거숭이로 만들었고, 아일랜드 사람들이 호숫가에 돼지우리 같은 지저분한 집을 지었고, 철도가 호수의 경계를 잠식했고, 한때 얼음 장수들이 얼음을 걷어 가기도 했는데 호수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내가 젊어서 보았던 호수 그대로다. 변한 것이 있다면 나 자신뿐이다. 호수에는 늘 잔물결이 일었지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름살은 단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월든은 영원히 젊다.

 

# 베이커농장

소로는 가끔씩 월든 호숫가가 아니라 베이컨 농장에서 살아보는게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과를 몰래 따먹고, 시냇물을 펄쩍 뛰어넘고, 나름대로 좋을 것 같은 생활인 듯 상상했다. 어느 날 비가 오자 가장 가까운 오두막으로 도망갔다. 그 오두막에서 만난 아일랜드에서 이주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존 필드는 정직하고 부지런하지만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농작일을 성실하게 임하지만 그가 빌린 땅에 대해 그는 얼마나 불리한 계약을 맺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무던했다... 소로는 그들의 삶을 듣다가 그들에게 여유있게 살 수 있는 법을 알려주었다.

당신은 기본적으로 차와 커피를 마시고 버터와 우유와 고기까지 먹기 때문에 그것들을 얻기 위해 땀 흘려 일해야 하고, 그렇게 일하면 몸에서 빠져나간 힘을 보충하기 위해 많이 먹어야 한다. 당신이나 나나 결과적으로는 비슷할 듯 싶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당신은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마냥 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차와 커피와 고기를 날마다 먹을 수 있으니까 미국에 온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것들 없이도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나라고, 노예 제도와 전쟁을 지지하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그런 것들에 직간접으로 드는 쓸데없는 비용을 국민에게 강제로 떠안기지도 않는다.

소로는 존 필드에게 새로운 나라에 왔다면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데 왜 오래된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느냐 이것이다. 오래된 생활 방식을 유지한다는 것은 절대 빈곤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말했지만 존 필드는 그 말에 아무 생각이 없다.

# 더 높은 법률

순간 야릇한 전율과 함께 야만적인 기쁨을 느꼈고 녀석을 잡아 날것으로 먹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우드척이 상징하는 야생성 빼고는 딱히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숫가에서 지내는 동안 한두 번 묘하고 자포자기한 기분에 굶주린 사냥개처럼 잡아먹을 수 있는 사슴을 찾아 숲속을 헤맸다. 어떤 짐승의 고기도 내게는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았다. 거칠고 난폭한 광경에 더없이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듯 더 높은 삶, 이른바 정신적인 삶을 지향하는 본능과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삶을 추구하는 또 다른 본능이 내 안에 공존하는 걸 느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두 가지 본능을 모두 존중한다. 또 선한 것 못지 않게 야성적인 것을 사랑한다. 내가 여전히 낚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낚시에 야성과 모험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야성적인 삶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하루하루를 동물처럼 살고 싶다.

나는 더 높은 법률이라는 제목이길래 법률 관련돼서 이야기 하는 줄 알았는데, 법률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소로는 딱히 채식주의자라서 채식을 택한 것이 아니고, 동물들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시작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로는 2년 2개월동안 혼자 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가는데 가끔 고기가 땡겨 사슴고기를 사냥하려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아니고서야, 빵과 물로 버티고 살아갔다. 소로는 낚시와 사냥을 매우 좋아했다. 근데 막상 낚시해서 잡아온 물고기들을 집에서 손질하고 먹으면 집안이 비린내로 가득차고 지저분해져서 안 먹느니만 못하다고 느꼈다. 마치 현대사회에선 집에 냄새 배일까봐 고기 구워먹지 않는 사람들 같다(나말이다). 어쨌든 소로는 커피와 차, 술도 마시지 않았다. 왜냐? 그는 맑은 정신을 지향했고, 무언가에 중독된 상태를 매우 싫어했다.
소로는 노동을 하는 이유는 더 많은 음식을 소비하게 되므로 심한 노동을 지양한다. 게으른 사람들이 더 많은 음식을 먹고, 성적 충동을 이기지 못 하고, 절제를 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소로의 말에 뭐든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나도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사는데, 소로는 날카롭고 직설적으로 말하지만 은근 맞는 말이다.

# 동물 이웃들

나는 그다지 평화롭지 못한 사건을 목격했다. 어느 날 장작더미,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루터기를 쌓아 둔 곳에 갔다가 커다란 개미 두 마리가 맹렬히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한 녀석은 붉은 개미였고, 다른 녀석은 그보다 훨씬 큰 검은 개미로 몸길이가 1.3센티미터쯤 되었다. 두 녀석은 서로 뒤엉켜 떨어질 줄 몰랐다. 나무토막 위에서 쉴 새없이 밀고 당기며 마구 뒹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놀랍게도 나무토막마다 그런 개미 전사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개미 두 마리의 결투가 아니라 두 종족 간의 전쟁이었다. 붉은 개미와 검은 개미가 대결하는 형세였지만 붉은 개미 두 마리가 검은 개미 한 마리를 공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 미르미돈 군단이 장작을 쌓아 둔 야적장의 언덕과 계곡을 뒤덮었고 땅에는 이미 전사했거나 죽어 가는 붉은 개미와 검은 개미가 널려 있었다. 그것은 내가 목격한 유일한 전투였고,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내가 발을 디뎌 본 유일한 전쟁터였다. 그야말로 대살육전이었다. 붉은 공화주의자와 검은 제국주의자가 목숨을 걸고 벌이는 치열한 전투였음에도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인간 전사도 그처럼 필사적으로 싸우지는 않았다.

되강오리, 개미, 고양이, 다람쥐,... 등 소로는 주변에 같이 공존하고 있는 동물들을 관찰했다. 솔직히 동물들을 관찰하는 부분은 너무 지루했지만, 개미들의 혈투만큼은 전쟁영화 만큼이나 리얼하게 재밌었다. 다른건 모르겠지만 소로는 정말 관찰력과 묘사하는 힘이 대단한 것 같다.

# 난방

집을 단순히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몸을 따뜻하게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내 집에 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한 쌍의 낡은 받침쇠를 구해 장작을 벽난로 바닥에서 살짝 떼어 놓았다. 내가 직접 만든 굴뚝 안쪽에 생기는 그을음이 보기 좋았다. 나는 여느 때보다 더욱 당당하고 즐겁게 불을 쑤석거렸다. 내 집은 규모가 작아 집 안에서 메아리가 즐길 수 없지만 방 한 칸짜리 집인 데다 이웃과 멀리 떨어져서 실제보다 더 커 보였다. 그리고 집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이 방 하나에 집약되어 있었다. 방이 곧 부엌이자 침실이었고, 응접실이자 거실이었다.

집이 좁아서 불을 조금만 때워도 집이 따뜻해지는데, 충격적인 말을 보았다. 실수로 산불을 낸 적을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는 말이 숲 일부가 불에 타면 숲의 주인보다 더 오랫동안 낙담하여 깊은 슬픔에 잠겼다고 한다... 그럼 내지 말 것이지. 또 난롯불불 켜놓고 장작패다가 침대에 불똥이 튀어서 침대에 손바닥만한 구멍이 생겼다고 한다. 이번 기회로 더 이상 불내지 않기를...

# 이전의 거주자들과 겨울 방문객들

“이전의 거주자들”

  • 카토 잉그램 - 콩고드 마을의 유지이던 덩컨 잉글램의 노예, 호두나무를 키웠는데 젊은 백인 투기꾼의 손에 넘어갔고, 소로가 살 땐 카토도 그 투기꾼도 모두 죽음.
  • 질파 - 목청이 큰 흑인 여자. 그녀는 매우 말랐다고 한다.
  • 브리스터 프리먼 - 재주가 많은 흑인으로 유명, 한때 마을 유지이던 커밍스의 노예
  • 스트래튼 - 한때 과수원 운영, 소로가 살 땐 몇 개의 그루터기만 남음
  • 브리드 - 비극적인 이야기가 있지만 굳이 밝히지 않음

 

“겨울 방문객들”

추운 겨울에도 널찍이 떨어져 있는 소로의 집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알렉 테리앙 - 시인.
  • 윌리엄 앨러리 채닝 - 인류의 진정한 친구. 철학가. 소로는 그를 정말 좋아했다.
  • 랠프 워도 에머슨 - 소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사람.

 

높이 쌓인 눈과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보랄르 뚫고 멀리에서 내 집을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시인이었다. 그런 혹독한 날씨에는 농부, 사냥꾼, 군인, 신문 기자, 심지어 철학자까지 겁을 먹을 수 있는데 시인의 발걸음을 막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시인은 순수한 사랑에 이끌려 움직이기 대문이다. 시인이 오고 가는 것을 누가 예측하겠는가? 시인은 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의사들이 잠자고 있는 시간에도 밖으로 뛰쳐나간다. 우리는 작은 내 집이 들썩일 만큼 떠들썩하게 웃기도 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지막이 주고받음으로써 집안을 가득 채우기도 하면서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 온 월든 골짜기에 조금이나마 보상을 해 주었다. 당시 내 집 분위기와 비교하면 브로드웨이 거리는 조용하고 한적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방금 주고받은 농담 때문이든 곧 상대방이 내뱉을 우스갯소리 때문이든 상관없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웃음의 축포를 터뜨렸다. 또 우리는 묽은 죽 한 사발을 나누어 먹으면서 사교적인 유쾌한 분위기가 철학이 요구하는 맑은 정신이 결합된 ‘참신한’ 인생론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 겨울 동물들

  산토끼 한 마리에게 먹을 것과 숨을 곳을 마련해 주지 못하는 시골만큼 척박한 곳은 없으리라. 몇몇 목동들이 잔가지로 만든 덫이나 말총 올가미를 놓았지만 우리 마을 숲에는 자고새와 산토끼가 넘치도록 많아서 늪지 주변에서조차 녀석들이 한가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소로는 이 추운 겨울에도 살아가는 겨울 동물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여우를 사냥하기 위해 사냥개를 풀어놓는 나이든 사냥꾼과의 이야기도 넣었다. 사냥꾼은 소로를 볼 때마다 “왜 이런 데서 살아요?”라고 묻는단다ㅋㅋㅋ

# 겨울 호수

소로는 도시 사람들의 인공 지식에 밝은 것은 인정하는 만큼 자연에 있는 사람들이 자연 지식에 밝은 것을 안다. 그들은 책을 쓰지도 않고, 책을 읽지도 않지만 그들이 행하는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다는 것을 안다. 소로는 그들의 낚시하는 법을 관찰하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월든 호수가 잴 수 없을 만큼 깊다고 생각한다. 소로는 그게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서 본인이 한 번 나침반과 쇠사슬, 측심줄을 이용해서 호수를 측정해 보았다. 소로가 잰 곳들 중 가장 깊은 곳은 31m였고, 그 후 물이 불어 1.5m 정도 수위가 높아졌으므로 33m 가까이 된다. 소로의 관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100여 군데의 수심을 재보려고 체크해 놨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가장 깊은 지점을 나타내는 숫자가 분명히 지도 한복판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소로는 지도 위에 자를 댔더니, 가장 긴 세로선과 가장 긴 가로선이 가장 깊은 지점에서 정확하게 교차했다. 믿거나 말거나 지만, 소로는 호수 측정에 진지했고, 그렇게 호수로부터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하기도 했다.

내가 월든 호수를 관찰하여 얻은 결과는 인간의 윤리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그것은 평균의 법칙이다. 두 개의 지름에 관한 교차 법칙은 우리를 태양계 안의 태양으로, 인체 내의 심장으로 인도할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 날마다 행하는 특정한 행동들과 그만을 향하여 삶의 파도를 종합하여 세로선과 가로선을 긋는다. 두 선이 교차하는 부분에 그의 인격에서 가장 높거나 깊은 곳이 나타날 것이다. 이때 그의 호숫가가 어떤 방향으로 기울었는지, 또 인접한 지역이나 환경이 어떤지 안다면 우리는 그의 깊이와 감추어진 바닥의 상태를 추정할 수 있으리라.

 

# 봄

봄, 겨울,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그는 숲에 와서 사는 매력 중 하나가 봄이 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여유와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따뜻해진 햇볕, 길어진 낮, 장작 피울 일은 줄어들고, 철새들의 노랫소리, 줄무늬 다람쥐 소리, 용감하게 나오는 우드척 등 봄이 오는 첫 징후를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한 차례 가랑비만 내려도 풀은 몇 배 더 푸르러진다. 마찬가지로 조금이라도 좋은 생각이 우리 사고에 유입되면 우리의 전망도 밝아진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살고 있다. 그러면서 과거의 의무를 이행하라고 주어졌던 기회를 그냥 흘려 버린 데 대해 속죄하느라 시간을 낭비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아무리 작은 이슬방울이 떨어져도 그 힘을 인정하는 풀잎처럼 주어진 모든 일을 유익한 방향으로 이용한다면 우리는 보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미 봄이 와 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겨울에 머문 채 뭉그적거린다. 상쾌한 봄날 아침에는 누구든 죄를 용서받는다. 그런 날은 악과도 휴전한다. 그 같은 봄날의 태양이 꺼지지 않고 불타는 한 사악한 죄인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잇다. 우리가 스스로 순수를 회복하면 이웃의 순수도 알아본다.

 

# 맺음말

소로는 첫해의 삶을 <월든>에 담았고, 나머지 해도 비슷하게 보냈다며 1847년 9월 6일에 월든을 떠났다고 했다. 소로가 말하는 인생에 대한 탐험과 도전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당신 자신을 탐험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소로는 숲에서 더 살 수도 있었지만 숲속 생활에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이유는 살아야 할 삶이 몇 가지 더 남아서 라고 말했다.

나는 실험을 통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을 배웠다. 우리가 저마다 꿈을 향해 자신 있게 나아가고 스스로 상상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평소에 기대하지 못했던 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고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서기도 하리라. 새롭고 보편적이고 더욱 진보적인 법칙이 우리 주변과 내면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혹은 오래된 법칙들이 확대되어 좀 더 진보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될 테고, 우리는 한 차워 높은 존재로 인정받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삶을 단순화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우주의 법칙도 간결해져 고독은 더 이상 고독이 아니고, 가난은 가난이 아니며, 약점 또한 약점이 아니게 될 것이다. 당신이 공중에 누각을 지었더라도 그 일이 결코 헛되지는 않으리라. 누각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이제 누각을 받칠 토대를 쌓기만 하면 된다.
아무리 삶이 초라해도 받아들이고, 또 살아라. 외면하지 말고 욕하지 말아라. 잘못된 것은 삶보다는 당신이다. 당신이 가장 부유할 때조차 당신 삶은 가장 빈곤해 보일 수 있다. 모든 일에 흠만 잡는 사람은 천국에 가서도 흠만 잡는다. 당신 삶이 빈곤하더라도 그 삶을 사랑하라. 구빈원 신세를 지더라도 얼마든지 유쾌하고 신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저녁노을은 부자의 저택 창문이든 구빈원 창문이든 똑같이 아름답게 물들인다. 봄이 오면 구빈원 앞이든 부자의 저택 앞이든 똑같이 눈이 녹는다. 마음이 평온한 살마은 구비원에서도 궁궐에서처럼 유쾌한 생각을 하며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이 누구보다 독립적인 삶을 사는 듯하다.




* <월든>을 읽고,

나중에 기억하기 기록하는 지루한 나의 블로그를 읽고, ‘정회성’님이 옮긴 <월든>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혹시나! 혹여나! 만에 하나! 있다면 말이다. 나는 꼭 마지막의 작품해설을 읽은 다음에 <월든>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사전 정보 없이 그냥 일단 무조건 읽는다. 소로에 대해서 아는 정보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일부 정도 였다. 하지만 작품해설을 읽게 되면 소로가 이 책을 어쩌다 쓰게 됐는지, 왜 2년 2개월의 자연생활을 시작하게 됐는지 알 수 있다. 난 이 작품해설을 읽고 나서야 도대체 소로가 세금을 내지 않았던 것인지, 도대체 소로는 왜 검소하게 사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지, 그에겐 어떤 손님들이 소중했었는지, 그에게 형은 어떤 존재였던 것인지, 그가 ‘월든’에서 어떤 개인적인 작업을 했었는지, 정말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지, 그의 삶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하버드’출신이었는지!ㅋㅋㅋ

솔직히 다른 책까지 모두 찾아 읽는 것은 내가 세상에 궁금한 것이 너무 많고, 소로에 대해 조금만 더 알고 싶으니 그가 2년 2개월동안 개인작업을 했던, 형과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쓰게 된 <콩고드강과 메리맥강에서 보낸 일주일>을 읽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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