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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두 번째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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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김초엽이다. 사랑, 차별, 이별, 그리움을 담은 그녀의 책은 너무 아름다웠다. 포근하고 친절한 김초엽 작가의 이야기는 순간에 나를 잊게 만드는 것 같다. 7편의 글 중 마지막 편 '캐빈 방정식'은 '물음표'로 남겨놓은 생각이다. 이상하게 그녀가 말하는 초현실적인 이야기는 현실의 무언가를 연상시켜 마치 익숙한 상황인 듯 느껴진다.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을 느끼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 이로써 그녀의 단편은 모두 마쳤다. 

 

# 최후의 라이오니

 

 로몬들이 주형 복제 시스템을 통해 태어나는 것. 로몬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각인되어 있지 않은 것. 그럼에도 내게는 두려움이라는 태생적 결함이 존재하는 것. 셀이 나를 라이오니라고 부르는 것. 시스템이 나에게 단독 의뢰를 맡긴 것. 
 깨달음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시스템이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 멸망을 지켜볼 때면 언제나 찾아들던 죄책감. 그럼에도 오직 이 도시를 마주할 때만 평온해지던 마음.
 나는 이곳에 와야만 했다. 
 "그래. 알겠어. 지금....."
 라이오니가, 나의 원본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셀을 만나게 해줘."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로몬'들은 유능한 유품 정리사이다. 멸망한 폐허에서 생의 온기가 남은 자원과 정보를 회수하여 우주의 다른 공간으로 보내는 일을 한다. '로몬'들은 태생적으로 참혹한 현실을 그대로 마주할 수 있도록 '강인함'을 갖고 있도록 훈련을 받곤 한다. '나'는 '로몬'으로서 강인함을 지니지 않고, 멸망과 죽음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로몬으로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지 않은 '나'는 어느 날, 3420ED라는 행성에서 단독 의뢰가 들어 왔다. 

 3420ED는 다른 로몬들도 관심이 있지 않은 오래 전에 멸망한 행성이었다. 멸망한 직후의 남은 자원과 정보들은 큰 보탬이 될 수 있겠지만, 3420ED엔 남은 자원과 정보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행성이었다. 한 마디도 쓸모없는 업무였다. '나'는 두려움을 갖고 있는 로몬으로 태어나 한 번도 멸망의 자리에 가서 업무를 수행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이 들어 모든 동료들이 말렸음에도 혼자서 3420ED에 갔다. 

 '나'는 이 넓디 넓은 행성에서 죽을 기회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 '죽음'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과 싸워 왔는데 3420ED에선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 행성에는 아무런 살아 있는 생명들이 없었고, 오로지 기계들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 기계들은 곧 파괴 직전이었지만, 죽은 기계들의 부품을 활용해 버티고 버텨왔다. 그 기계들의 수장인 '셀'을 '나'를 가두고 "라이오니"라고 부르며, 그녀에게 오래된 통조림을 갖다 주며 그녀를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이 '라이오니'라는 사실을 빨리 기억해 내라고 한다. 

 셀은 사실 곧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셀이 죽으면 이 행성도 자연스럽게 파괴되는 것이었다. '나'는 셀이 자신을 "라이오니"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고 싶었고, 셀의 동료 기계들이 그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아주 옛날, 3420ED에 사는 행성인들은 불멸의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불멸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은 복제품을 개발해내 그의 생각을 복제품으로 이동시켜 계속 그 삶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멸을 살 수 있다는 것은 공포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복제품 중 하나인 '라이오니'는 공포를 느낄 수 있었던 불량이었기 때문에 곧 폐기되기 직전이었다. 어느 날, 불멸의 존재였던 이 불멸인들에게 재앙이 찾아온 것이었다. 다른 복제품에게 자신의 삶을 전이할 수록 전염병을 얻게 된 것처럼 불멸인들이 죽어갔다. 수십세기동안 불멸이라는 타이틀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전혀 공포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었는데, 갑자기 얻게 된 그 감정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모든 살아있는 (구)불멸인, 복제인 모두가 남은 생을 살기 위해 도망치듯 3420ED를 빠져 나가서 살기 시작했다. 그 때 라이오니는 당시에 있었던 '노예'같은 존재였던 기계들을 구해주고 그들을 책임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행성을 빠져나가지 않고 기계들과 함께 살려고 했지만, 기계들은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그녀의 삶을 살기엔 생명의 자원이 남아 있지 않아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래서 그녀를 보냈다. 

 셀은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고, '나'가 이 행성에 오자마자 그녀가 라이오니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녀는 셀이 죽을 때까지 라이오니인 척하며 셀을 보내 주었다. 셀이 죽자 그 행성이 파괴되고, '나'는 로몬들이 있는 원래 행성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문득 자신도 라이오니가 복제 불량품이었던 것처럼 로몬의 불량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라이오니의 복제품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 아닌지, 그래서 최초의 라이오니가 자신에게 의뢰해서 최후의 라이오니로서 3420ED의 멸망을 직접 볼 수 있게끔 메시지를 받은거라 생각한다. 라이오니는 짧은 생으로 책임지지 못했던 3420ED의 멸망과 동지들이었던 기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가 되었던 것 같다. 

 '공포'라는 감정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인 것 같다. 우리는 공포 그리고 불안에 대해 부정적인 단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렇게 갖는 감정들은 어쩌면 기대와 설레임도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불멸인들이 죽지 않아서 그들은 삶의 공포도 없었고, 기대도 없었다. 난폭해지고 왕처럼 제멋대로 굴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다른 행성들에게 왕따를 당해서 단절된 행성이 되었지만. 인간이 갖고 있는 공포와 불안은 우리의 인생을 재미있게 궁금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대단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 마리의 춤

 

 음악에 맞추어 무대의 끝에서 끝으로 뛰고, 구르고, 손끝을 접으며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 순간 움직임은 마리에게 아주 중요한 무언가인 것 같았다고. 그게 마리의 변덕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자리를 떠나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는지, 그것도 아닌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춤의 어떤 부분들은 플루이드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어떤 순간에 마리는 진심으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는 말했다.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날 제가 보았던, 마리의 춤에 대해서요."

 

 모그는 일종의 시지각 이상증을 겪는 사람들로 현 미성년 인구의 최대 5퍼센트 정도로 추정된다. 모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주로 편의 시설이 잘 구비된 특수 구역에 거주하며 주로 저들끼리만 교류하는 등 폐쇄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모그의 부모 세대 개발자들이 만든 1세대 플루이드는 네트워크가 내면으로 쏟아져 나올 수 있는 감각 보조 장치를 이용해서 모든 사람을 상시적인 온라인 상태에 두는 기술이다. 

 소라는 친구의 사촌 동생 마리에게 춤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반년동안 눈이 보이지 않는 모그인 마리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마리는 꽤 잘 따라 추곤 했다. 그런데 마리는 춤의 디테일을 살리기 보다는 춤의 모양만 추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마리는 소라에게 배운 춤을 보여줄 수 있는 공연을 열었다고 했다. 소라는 아직 마리가 누군가에게 춤을 보여줄 정도로 완성된 상태가 아닌데, 공연을 연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리는 소라에게 기존 플루이드에서 업그레이드를 시키고 있다고 말했고 소라에게 잠깐동안 플루이드를 경험시켜 주었다. 모그가 아닌 사람들은 시각으로만 사물을 바라보는데, 플루이드를 연결한 상태는 뇌로 온라인 접속을 해 다른 사람들과 모든 내용들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소라는 마리의 플루이드를 경험했을 때, 자신이 마리에게 가르쳐준 춤을 다른 모그들이 따라 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와르르 쏟아져 나온 감각으로 모그들은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가르쳐주고,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소라는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 모그들이 공연 당일에 엄청난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라는 마리를 말리려고 애썼지만, 결국 일은 벌어졌다. 마리는 춤을 추는 공연을 벌이면서 사람들에게 모그가 아닌 사람들에게 모그가 되게 만드는 캡슐을 터뜨려서 플루이드를 체험해 보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 테러로 인해 플루이드 사용은 금지가 되었다. 그리고 모그가 된 모그가 아닌 사람들은 치료를 받곤 했다. 사건에 방임자로 지목된 소라는 한동안 조사를 받느라 애먹었지만 가끔씩 마리가 생각이 났다. 어느 날, 모그 한 명이 찾아와 마리의 춤 영상을 보여줬다. 마리는 굳이 춤을 추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누군가에게 바치듯이 열심히 춤을 추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모그'는 장애인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마리는 모그라는 이유로, 잘 해내지 못 하고 엉망으로 결과를 만들어도 사람들의 동정과 박수갈채를 받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모그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지워버리는 모그가 아닌 사람들에게 모그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똑같은 걸을 느끼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플루이드'인 것이다. 플루이드 안 속에선 모든 사람들이 공평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을 초월한 의사소통 체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리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계속 존재감이 없는 위치였던 모그들의 반란으로 사람들은 모그들을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소라는 마리가 모그였음에도 진심을 다해 춤을 가르쳐 주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한계를 규정짓지 않고 공평하게 가르쳐준 소라에게 조금이나마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 공연에서 춤을 열심히 추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 로라

 

 침묵하는 진에게 로라가 말했다. 
 "네가 떠나면 난 아주 슬플 거야. 너를 사랑하는 일은 나를 기쁘게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어. 나 자신이 되는 일은 인생 전체를 건 모험이야. 네가 날 지지해주면 좋겠어. 그럴 수 없다면....."
 로라는 말을 멈췄다가, 진을 한참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래도 상관없어. 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까."

 

 진이 스물 한 살에 만난 로라는 당당하고 어떤 일이 벌어져도 무던했다. 로라는 자꾸 넘어지고, 엎지르고 떨어뜨렸다. 그녀는 어릴 적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후유증으로 가끔 몸에서 힘이 빠졌다고 했다. 10년 후, 로라는 진에게 팔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고 한다. 진은 멀쩡하게 생긴 팔을 놔두고, 왜 기계팔을 더 붙이고 싶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한 쪽 팔은 종종 힘이 빠지곤 했다. 그녀는 등 뒤에 새로운 팔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 팔이 느껴졌고 그 팔을 만들어 붙여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진에게 사랑과 이해는 다른거라며, 로라는 결국 한 쪽 팔을 붙여 버렸다. 

 로라를 이해할 수 없었던 진은 로라를 이해하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로라가 존재하지 않은 한 쪽 팔을 느낀다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마드리드에선 절단 욕구를 원하는 사람들, 고유 감각 자체를 상실한 혜윤, 미국에선 신체를 변형하는 트랜스휴먼. 이렇게 본디 느껴야 하는 감각을 느끼는 것을 거부하거나 느낄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서 로라를 이해해 보려 했다. 그 책을 <잘못된 지도>라는 이름을 출간했는데, 사람들은 그 여정을 보며 많은 것을 얻었고,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그 책을 쓴 진은 끝까지 로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독자 한 명이 자신의 연인도 로라같이 어떤 잘못된 지도를 선택하려고 한다고 책 후기를 남겼다. 진은 그 후기를 읽으며, 자신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로라가 한 말을 떠올렸다. 진이 로라를 이해하기 위한 모든 여정을 생각하면 기쁘고 슬퍼진다고 한다. 하지만 확실히 해야하는 것은 진이 한 일은 로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진은 그 독자에게 답장을 하고, 답장을 마친 뒤 초인종이 울렸는데 로라가 그 곳에 서 있었다. 

 김초엽 작가는 SF소설 작가가 아니라 단연코 로맨스 소설 작가임에 틀림없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이해할 수 없음에도 사랑하는 것이다. <행성어 서점: 선인장 끌어안기> 이후, 나는 김초엽 작가의 이런 사랑에 대한 정의를 그녀만의 방식으로 내리는 것이 참 아름다운 것 같다. 로라의 인위적인 기계의 팔이 진물이 나오고, 그녀의 몸에 맞지 않더라도 그녀는 제 3의 팔을 원했다. 진은 끝까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멈출 수가 없다. 로라는 진이 떠난 여행이 로라를 위한 여행이 아니라 진 자신을 위한 여행이라는 일침 자체가 정말 맞는 말이었다. 로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자신이 힘들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보려 떠난 여행이었지. 사랑하니까 이해해보려 하는 것이지, 이해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 숨그림자

 

 단희는 손을 내밀어 유리병을 받았다. 조심스럽게 밀봉된 필름을 벗겨냈다. 뚜껑을 열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유리병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졌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남자는 단희에게서 유리병을 건네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넘겨주는 순간 단희가 심하게 손을 떨었고 병은 그만 바닥에 떨어져 엎질러지고 말았다. 
 단희는 그 즉시 방을 채우는 어떤 입자들을 느꼈다. 입자들은 일렁였고 공기 중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단희는 희미하게 감지되는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양말이 사막 구석에서 모자를 쓰고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제 단희에게도 입자들은 의미라기보다는 냄새에 가까워졌다. 둔감해진 후각기관은 한때 조안이 했던 것처럼, 공기 중에서 어떤 기억과 감정을 읽었다. 입자들이 단희를 그 시절로 데려갔다. 의미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ㅇ에게로.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너무 구체적이어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장면으로. 조안이 말했던 그 공간들로. 

 

 숨그림자 사람들이 사는 행성의 지상은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고, 늘 유독한 비가 내리는 탓에 지하에 그들의 터전을 개척했다. 숨그림자 사람들은 호흡으로 의미를 읽는다. 공기 중에 단 여덟 개의 입자만 섞여 있어도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들은 대화를 호흡에 따른 입자로 하는데, 그 입자들은 단어, 문장, 감정을 만들어낸다. 단희는 숨그림자 사람으로서 [사랑]을 의미하는 입자들이 공기 중에 가득 차 있을 때가 좋았다. 단희는 16세의 학생이란 신분으로 의미합성 연구원의 보조 연구원이 되었다. 그 때, 단희는 조안을 만났다. 

 조안은 지구에서 출발해 다른 행성으로 가던 원형 인류였던 것이다. 그 원형 인류들이 다른 행성으로 옮기려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조안만 살아 남았고, 조안은 실험 대상이었다. 갇혀 있는 조안은 입 밖으로 말을 내뱉고 단희는 호흡으로 말하기 때문에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었지만 둘은 왠지 통하는 것만 같았다. 단희와 함께 있으면 조금 누그러워지는 조안을 보며 연구원 사람들은 단희에게 조안을 맡겼다. 둘은 어설픈 이중 통역기를 사용해서 대화를 이루어 나갔다. 하지만 둘은 천천히, 가능한 한 오랜 시간 이야기했다. 

 단희는 조안처럼 학교를 다녔지만, 호흡으로 말하는 숨그림자 사람들의 말을 이중 통역기로 사용해서 어설픈 음성 통역으로 수업을 듣는건 고역이었다. 조안은 숨그림자에 온 지 2년이 지난 후, 라이브러리에 보관된 과거 문서들을 복원하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쓰는 공용어 자료가 많은데, 조안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숨그림자 사람들은 조안을 경계하고 그녀가 괴물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녀의 존재감이 묻혀져 갔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면 조안 때문일거라 의심했다. 

 단희는 조안의 이중통역기로 사람들과 힘들게 말하는 것을 느끼고, 조안이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의미합성기'를 개발했다. 공식적으로 사고나 질환으로 언어 능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연구였지만, 단희는 오로지 조안을 위해 개발하고 있는 연구였다. 의미합성기가 있으면 이중 통역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바로 그들은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조안은 그 개발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왜냐면 어차피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 단희처럼 오랜 시간을 공들일 생각이 없는데, 그녀는 누구를 위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조안은 단희에게 후각에 대해 설명해준 적이 있다. 호흡으로 대화하는 방식보다는 무언가 추상적이면서 상황을 알게 해주는 후각이라는 감각을 조안의 세계에서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줬다. 그녀는 며칠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오더니 단희에게 유리병 하나가 담긴 유리병을 주었다. 단희는 ['양말이 사막 구석에서 모자를 쓰고 발견되었다.......']라고 그 공기를 읽어버렸다. 그 냄새는 조안의 아버지가 어디선가 구해온 방향제 냄새였다. 그리고 조안은 단희에게 읽지 말고 느끼라고 조언했다. 그 후, 조안은 어디선가 냄새를 구해와 단희에게 선물해 주었다. 

 조안은 우주선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숨그림자 사람들과 함께 탐사에 나섰다. 단희는 조안을 보내주었고, 단희는 숨그림자에 남아 그녀의 '의미합성기'를 개발하는 연구에 집중했다. 나중엔 그녀가 개발한 도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얻었지만, 결국 그녀는 너무 많은 호흡을 연구에 써버린 탓에 나중엔 호흡으로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새벽, 조안과 함께 떠났던 탐사대가 반세기가 지나고 돌아온 것이다. 조안은 너무 체력이 노쇠해져 같이 올 수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유리병이 담긴 선물을 보내왔다. 그제서야 단희는 후각을 느끼며 유리병에 담긴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단희와 조안은 같은 얼굴을 갖고 있지만, 대화는 같은 방식으로 할 수 없다. 어떤 좋은 통역기계가 있더라도 그 말을 직접 배우고 하지 않는 한, 그 말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안과 단희는 서로에게 충분히 오랫동안 시간을 투자해서 이야기를 했다. 조안은 숨그림자를 떠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지만, 단희를 사랑했던 마음 만큼은 진심이었다. 단희를 위해 지상으로 올라가 사막에서 냄새를 담아와 그녀에게 선물해서 같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사랑이란 비로소 같은 것을 느끼게 될 때를 말하는 것인가? 


# 오래된 협약

 

 "신도 금기도 없지. 오직 약속만이 있단다."
 저는 바닥에 머리를 기대고 여전히 그 공간을 떠돌고 있는 목소리의 잔해를 들었습니다. 제가 평생을 지나도 이해할 수 없을 어떤 결정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먼 우주에서 온 작은 존재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떼어 주기로 결정하는 마음이, 이 잠든 행성 벨라타 전체에 깃들어 있었어요. 저는 눈을 감고 그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오래된 협약을, 수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지키고 있는 존재들을. 

 

 벨라타 행성에 있는 사람들은 지구인들에 비해 짧은 수명을 지녔다. 그들은 25년을 넘겨 살지 못했다. 벨라타인들은 생애 마지막 다섯 해에 몰입이라고 부르는 상태에 빠진다. 그 몰입 단계는 기억상실, 지성, 언어능력의 급격한 감쇠를 경험한다. 그런 몰입을 벨라타 신에게 정신이 귀속되는 과정으로 여긴다고 한다. 벨라타엔 가장 특징적인 지형이 있는데, 언뜻 특이한 모양의 바위처럼 보이는 것들이 들판 가득히 규칙적으로 펼쳐져 있다. 그것을 "오브"라고 부른다. 벨라타 사람들은 오브를 먹지도, 접근하지도, 손을 대지도, 훼손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벨라타 신앙의 가장 강력한 금기이다. 

 벨라타의 사제인 노아는 지구에서 온 이정을 만났다. 노아와 이정은 서로 좋아했지만 벨라타인들의 가치관과 지구에서 온 탐사대와의 마찰이 있었기에 서로 미래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정은 노아가 25년 밖에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에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몰래 오브에 접근했고, 그녀를 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벨라타의 대기엔 루티닐이라는 물질이 벨라타 사람들의 수명을 줄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벨라타인들이 오브를 먹는다면 루티닐은 감소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것이다. 노아는 당시 이정의 말대로 행하지 않았던 이유를 편지로 써 말해 주었다. 

 오브들은 이 행성 전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땅 위로는 몸의 일부를 드러낸 채, 행성 자체로 기능한다. 게체인 동시에 집단이며 지성체이다. 먼 우주에서 온 탐사선이 이 행성에 도착했을 때, 오브들은 인간들을 관찰했고, 자연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취약한 생물체임을 알고 연민을 발휘해 그들이 냅두었다. 하지만 점점 오브를 장악해가려고 하는 생물체들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모두 죽여 버리려고 했지만, 오브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들에게 오브의 시간을 나눠주며 25살이라도 살게 해주는 것이다. 오브의 자비에 감사하면서 사제들을 키워내며 벨라타를 얹혀 사는 것이 벨라타인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노아는 미래를 기약했지만 기약없는 미래를 꿈꾸었던 이정에게 편지를 보내며 마무리 짓는다. 

 오브는 지구를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은 과연 지구의 일부였을까? 아니면 외부 행성에서 온 생물체였을까? 그래서 지구에 적응해 나가고 있는 것일까? 지구는 오브처럼 잠들어 있는다. 언제 오브가 깨어나서 지구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시간을 빼앗아갈지 모르는 일이다. 처음엔 러브레터처럼 읽혔지만 무언가 이 웅장해지는 마음은 감당되지 않았다. 


# 인지 공간

 

 학자들은 이브에 대한 기억을 격자에 영구적으로 기록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동안 이브는 격자 구조물의 어딘가에 남아 있겠지만, 나중에는 그 위에 새로운 정보가 덧씌워질 것이다. 모든 기억은 낡아가고, 시간의 흐름 앞에서 그 가치를 시험당하며, 남을 가치가 없는 기억은 지워진다. 
 나는 문득 슬픈 진실을 깨달았다. 이브는 이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만 희미하게 떠돌다가, 공동 지식의 기억 쇠퇴 현상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세 번째 달처럼. 

 

 이브는 작게 태어난 아이였다. 그래서 너무 연약해서 모든 어른들의 보호를 받느라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하지만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한 초등학교 교사는 자신의 딸 제나를 이브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제나는 남들보다 몸집이 커서 아이들은 제나에게 꼼짝을 못했다. 그 때부터 제나와 이브는 목적을 위해 붙어 다녔지만 그들은 진실로 사랑하는 친구가 되었다. 

 인지공간은 여러 이름을 가졌다. 큐빅 시스템, 공동 지식 구역, 격자 구조물, 때로는 그냥 격자 혹은 공간이라고 불린다. 사고는 공간적이고, 개념은 격자 속에 배열된다. 격자 구조물은 우리가 사고를 실체화하는 매개체다. 인지 공간은 유기체 뇌의 한계를 넘어 지식이 영구적으로 보관되도록 돕는다. 오직 인지 공간을 통해서만 지식은 전승되고 남겨진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한계를 규정짓는 듯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지 공간 안에서 우리의 기억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다른 아이들은 성장하고 나면 인지공간에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는데, 이브는 몸집이 작아 격자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이브는 인지공간에도 지식의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나는 직접 인지공간은 체험했는데 이브의 말이 와닿지 않았다. 제나가 체험한 인지공간은 광대한 지식으로 가득차 있었고, 모든 지식들이 다 존재했다. 제나와 이브는 인지공간의 한계에 대해 말하다가 서로 지치기도 했다. 이브는 어느 날은 인지공간은 중요한 정보 외에 쓸모 없는 정보들은 서서히 희미하게 잊혀갈 수 있도록 중요한 정보의 저장공간을 확보해 나간다고 했다. 제나는 이브의 논리가 맞는 것 같았다. 

 어느날 이브는 들짐승에게 물려 죽게 되었고, 제나는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제나는 이브가 만든 '스피어'라는 이브의 개인 격자 구조물이었다. 그녀의 스피어엔 제나와 이브가 했던 모든 말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제나는 이브에 대한 기억을 사람들이 쓸모 없는 기억이라고 치부하고 그녀에 대한 기록을 짧게 남기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제나는 이브의 뜻을 받아 들이기 위해 인지공간의 지식 한계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보러 나갈 준비를 했다. 

 현대 사회에서 수없이 많은 정보들이 인터넷에 존재하고 있다. 매일 새로운 기사들과 이슈들이 쏟아지고 있다. 광대한 정보에 압도되어 우리의 소중한 추억, 사회적 약자, 어떤 제약으로 인한 피해자 등의 것들은 희미하게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되돌아 볼 필요를 느꼈다. 이브는 어릴 적에 몸이 약한 탓에 다른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제나는 그녀가 지금은 괴롭힘을 당하지만 인지공간을 공부하게 되면 이브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부질없었던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거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브는 달랐다. 자신은 이렇게 괴롭힘을 당해서 힘들었는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 것이 싫었다. 많은 사회적인 이슈들 속에 피해자들은 이렇게 광대한 정보에 의해 이브처럼 묻혀져 간다. 제나는 이브를 잊지 않기 위해 세상을 향한 나아가는 것이 우리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캐빈 방정식

 

 캐빈과 구조물이 스치며 철컹 소리가 났다. 설명하기 힘든 예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움텄다. 기묘한 일렁임을 느꼈다. 캐빈이 기울어져 흔들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 일렁임은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입을 열었다. 
 "언니."
 언니의 손에서 보조기기가 미끄러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보조기기가 발끝을 쳤다.
 동시에 나는 느꼈다. 
 가슴 부근에서 시간의 거품이 톡하고 터졌다. 신경세포들 사이로 파동이 퍼져나갔다. 시공간의 빈 방울이 자글거리며 심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야 소문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귀신도 피 흘리는 소년도 아니었다. 국지적 시간 거품이었다. 정상에서 몇 번이나 경험했던,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울렁이는 감각의 근원. 분리된 하나의 주머니 우주와 스쳐 가는 순간이었다. 지금 언니의 의식 세계를 잠식했을 기이한 파문을 생각했다. 끝없이 느린 시간 속에서 언니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이 거품의 존재를 지각할 것이다. 이제 언니는 시간 거품을 온전히 감각하는 세상의 유일한 사람이 된 것이다. 
 "정말이네."
 어떤 허탈감이, 매듭이 풀려나가는 감각이 내 안에서 심장을 끌어 내렸다. 
 언니가 옳았다.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 세계는 거품 방정식의 해로 가득 차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니는 아주 천천히, 영원에 가까운 속도로 입꼬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언니가 의기양양하게 소리를 내어 하하 웃는 것처럼 보였다. 
 거봐, 내 말이 맞았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지가 느꼈던 시간의 거품이 무엇일까? 현화의 시간은 다른 사람들 보다 느린 시간에 존재했다. 현화는 왜 현지의 간호에서 벗어났던 것일까? 왜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을 끝까지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린 날의 자매의 추억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까? 아직도 나는 이 책이 어렵다. 아마도 현지처럼 이해할 시간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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