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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진이, 지니, 생의 가장 치열했던 사흘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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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캐스팅

진이(진기주), 민주(최우식)


이상하게 요즘 정유정 작가 책에서 표현하는 삐쩍 마른 남자를 떠올리면 항상 최우식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ㅋㅋ 민주라는 역할은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부모님이 포기해서 집에서 쫓아내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민주는 만사가 귀찮고, 이리 떠돌고 저리 떠돌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맥아리없는 사내다. 그런 역할은 뭔가 최우식이 해야 뭘해도 귀엽고 정이 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진이는 컷트 머리에 키도 크고 뭔가 똑부러지는 이미지다. 그리고 은근 개꼰대다. 보노보로 변했을 때, 진이에 대한 호칭을 예의없게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내 몸으로 돌아가면 너넨 뒤졌으~"같은 꼰대 마인드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근데 밉지가 않다. 진이는 용감하고, 정의로우며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를 빨리 파악한다. 이런 이미지를 상상했을 때, 사실 정유미가 가장 먼저 떠오르긴 했는데, 정유미는 어디에서나 잘 어울릴 것 같아... 생각을 넣어뒀지. 그리고 바로 떠오른 배우가 진기주다.

# 같은 유니버스인가요, 작가님?

한기준(최원영)

<28>를 완독하자 마자 <진이, 지니>를 시작했는데, 아니, 글쎄.. 한기준이 등장했다. <28>에서 링고와 전염병으로부터 끝까지 살아남았던 한기준을 <진이, 지니>에서 절뚝거리는 몸으로 나타났다. 한기준의 등장만으로도 너무 우직하고, 든든하고 민주, 진이, 지니를 지켜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기준은 특별 출연이었는지, 최선을 다해 민주, 진이, 지니를 도와주진 않았지만 그는 다른 방면으로 그들을 감싸주곤 했다.
사실, <28>을 봤을 때, 내가 가장 열심히 이입했던건 단연코 '재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면 '재형'은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무차별적으로 죽어가는 개들을 지켜내려고 애썼지만 실패하고, 마지막 링고와 함께 죽어가던 모습이 짠내가 폴폴 풍겼기 때문이지. 그런데 에필로그에서 '기준'을 봤을 때, 기준이 받았을 충격과 상처, 재형의 희생으로 빚진 생명을 갖는 심정 등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 기준을 <진이, 지니>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 보노보

  보노보: 영장목 성성이과에 속하는 유인원으로, 인간과 가장 유사한 DNA(98.7% 일치)를 가졌으며, 학계 일부에선 현존하는 세 영장류(침팬지, 인간, 보노보)의 '원형'과 가장 닮은 꼴로 본다. 침팬지보다 체구가 작지만 공감 능력은 훨씬 뛰어나며, 온순하고 쾌할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이고 다소 공격적이며 수컷 중심 사회를 이루는 침팬지와 달리, 연대와 평화를 중요시하고 암컷 중심 사회를 이룬다. 무리 간의 성생활이 자유롭고, 성을 연대와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특성을 지녔다.  

영장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굳이 종류를 말하자면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원숭이..? 이 정도가 다였다. 보노보? 보노보노?ㅋㅋ 이게 뭔가 했지. 나는 사실 이 책에서 가상으로 만들어낸 동물 종류인 줄 알았다. 바로 구글링을 해보니 사진이 떡 하고 나왔지 뭐람.. 나는 정유정 작가 책을 보면서 맘이 찢어지는 순간이 여럿 있었는데, <완전한 행복>에서 은호의 아들이 갑자기 죽었을 때, <7년의 밤>에서 세령이 현수에게 목졸려 죽었을 때, <28>에서 스타가 기준이 내리찍은 도끼에 맞아 죽었을 때,... <진이,지니>에서 지니가 훈련사한테 춤배우면서 겁나 얻어터질 때.. 정유정 작가가 동물과 아이한테 가해진 폭력들을 표현할 때마다 맘 찢어져서 미칠 것 같다..ㅠㅠ


# 과거의 트라우마로 한 팀이 된 진이와 민주, 그리고 구원

진이가 킨샤사에 갔다가 밀렵꾼에게 잡힌 어느 보노보를 마주쳤다. 진이는 충분히 그 보노보를 탈출시킬 수 있었으나, 돈을 꽤 많이 쳐주는 보노보를 탈출시켰다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서 그 보노보를 무시하고 그 공간을 도망쳐 나왔다. 보노보를 바라 보고 “나는 진이야, 이진이”라고 말하면서 파인애플 꼬치를 건네 놓고는 철창 안에 갇힌 보노보를 두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 갔다. 킨샤사에 돌아온 진이는 사육사 일, 뭐 영장류 센터 등등의 일들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킨샤사의 기억은 그녀가 하는 일의 모순이 되는 순간이라 진이는 죄책감을 안고 독일로 유학을 가려 한다.

민주는 공익 근무 요원 시절에 노인들에게 반찬들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배달은 자고로 신속이 생명인데, 노인들은 민주가 반찬을 배달할 때면 그를 불러 일거리를 시켜서 항상 두어 시간을 넘겨서 배달을 마쳤다. 어느 날 문 밖에서 늘 기다리던 해병대 할아버지가 없었고, 집 안에서 민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인지, “어이”인지… 민주는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다른 집부터 배달을 마치고 해병대 할아버지 집으로 다시 향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죽었다. 민주는 자신이 무시하지 않았다면,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잘 보내줄 수 있었을지, 혹은 할아버지가 살지는 않았을 지에 대한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없다.

어떻게 그들은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알면서도, 겁이 났다. 이 세상에 내가 부재하게 되리라는 사실보다 작별이 무서웠다. 내 삶에서 유일무이하고 전적인 존재, 나 자신과 헤어지는 게 미치도록 무서웠다. 다시는 나로서 생각하고, 나를 의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지니 앞에 엎드려 애원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너의 생을 내게 양보해달라고 떼를 서서라도 살고 싶었다. 그것은 내 안, 가장 깊은 바닥에서 울리는 본성의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떠난 후부터 내게 죽음은 두려운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두려움을 피하려고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하려 들지 않았다. 피할 수 없을 땐 고의적으로 감정을 격리시켰다. 죽음은 너의 일이지, 나의 일은 아니라 여겼다. 죽음과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보지 않았다. 장례식에선 유족의 슬픔을 마음 깊이 공감하지 않으려 애썼다. 심지어 건강검진조차 받으려 하지 않았다. 홍해파리처럼 영원히 살 것도 아니건만,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나는 두려움을 따돌릴 수 있었다. 적어도 그렇다고 믿었다.
만약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대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였더라면, 삶의 한가운데에 죽음이 있다는 걸 인정했더라면, 나와 작별하는 법을 미리 배웠더라면, 지금의 나는 좀 달랐을까. 운명에 분노하는 대신 이것이 그저 내게 주어진 패라는 걸 인정할 수 있었을까. 떨지 않고 의연하게, 타당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진이는 ‘지니’라고 이름을 지은 보노보를 구조하고 영장류센터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진이는 눈을 떠보니 지니 안에 갇혀 있었다. 그녀의 몸은 온데간데 없고, 지니의 몸에 빙의된 채 있었는데 그 몸에는 지니의 영혼 또한 있었다. 진이는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흘동안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진이가 지니 몸에 있을 때, 지니의 기억까지 읽을 수 있었다. 지니는 자신의 가족들과 단란하게 지냈었는데, 밀렵꾼에 의해 잡혀 왔던 것이다. 진이가 킨샤사에서 봤던 보노보가 바로 지니였고, 지니는 한국까지 배를 타고 와서 ‘인동호’에 도착해 춤 선생에게 학대를 당하면서 트릭을 배우고 있었다. 지니는 킨샤사에서 자신을 모른 척하고 떠난 진이를 원망했다. 진이도 지니 몸에서 그 기억을 잃고, 그녀를 가족에게로 돌려보내주고 싶었다. 진이의 몸은 반시체라서 그 몸에 들어가면 아예 죽게 될 것이라 지니의 몸을 차지하면 적어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니의 인생을 두 번이나 빼앗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몸으로 돌아갔고, 자신의 마지막 유언을 통해 지니의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민주는 그 당시 모른척 했던 “아이”인지 “어이”인지 그 말을 모른 척했던 자신의 행동에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그는 캠핑하면 안되는 구역에서 침낭을 펴고 자고 있다가 교통사고로 인한 클락션 소리에 깨서 딜레마에 빠졌다. 그들을 아는 척하고 구해주게 되면 그는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었는지 조사를 받다가 벌금을 물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또 한 번의 모른척으로 자신의 마음에 죄를 쌓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119에 신고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지니 안에 있는 진이를 만났다. 진이에게 천 만원이라는 돈을 받고 도와주기로 계약을 하고 시작했지만, 민주는 최선을 다해 진이와 지니를 도와 주었다. 그의 전재산과 자존심까지 바꿔 가며, 진이와 지니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 타인의 삶을 대하는 자세

  민주는 공익근무시절, 닥터K한테 죽은 사람의 시체를 처리하는 “문지기”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학력에, 공무원 시험 준비만 n년을 했고, 그러다 집에서 쫓겨난 한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닥터K에게 시체 처리하는 순간만큼은 “타고난 문지기”라는 칭찬을 들었다.

민주는 진이가 지니의 몸에서 나와 그녀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이가 민주에게 줄 천 만원은 잊은 지 오래였다. 민주는 진이와 지니에게 진심이었다. 진이가 진이의 몸으로 돌아갈 때, 가지 말라고 말릴 수 있었으나 그는 “타고난 문지기”였으므로 그녀를 막을 수 없었고, 그녀가 원하는대로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 답이었다. 민주는 진이가 떠난 이후에 노숙 생활을 접고, 닥터K에게 문지기 일을 배웠다.

고시원에 살던 시절 어느 남자의 자살을 목격한 뒤, 인생의 덧없음을 느껴 노숙을 했지만 타인을 돕고, 타인을 응원하는 일을 진이와 지니를 통해 배우게 된 것 같다. 나는 민주의 따스한 배웅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내가 아는 건 김민주라는 이름뿐이었다. 삶의 마지막 사흘을 함께 보냈고, 마지막 생일을 축하해준 사람이었으며, 나를 ‘나의 친구’라고 불러준 이였으나 우리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관계였다. 그러므로 그와 나의 관계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머니에게 내가 그랬듯, 그도 내게 미안하고 고마운 존재였다는 것 말고는.
나는 새로운 메모장을 열었다. 그에게 남기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민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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