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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28, 정유정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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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 전에 봤던 작품 <완전한 행복>, <종의 기원>, <7년의 밤>을 읽고 정유정 작가의 숨막히는 전개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나갈 줄은 몰랐다. 지금에서야 우리가 코로나 상황을 겪고 있으니까 전염병이 닥쳤을 때, 정부의 대처라던지 사람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 하는지 알 수 있지만 <28>의 최초 발행일은 2020년 10월 16일이다. 물론 전염병 혹은 좀비 영화만 보더라도 어떤 식으로 상황이 흘러갈 지 이미 예상할 수도 있지만 정유정 작가는 상황과 심리적 묘사가 대단했다.

이 작품을 읽을 땐, 여섯 인물에 집중을 해야 한다. 재형, 윤주, 기준, 동해, 수진 그리고 링고. 항상 처음에 정유정 작가 책을 읽으면 시점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읽으면서 앞의 내용을 두어번 체크해야 한다는 노하우도 있기 때문에 인물 시점별로 체크해뒀던 것 같다. 일단 가장 충격적인 시점은 아무래도 ‘링고’의 시점이었다. 아니, 개의 마음까지 이입한다고? 심지어 강아지의 울음소리, 몸동작 등 디테일함이 놀라웠다.

휴, 빨리 내 머릿 속에 있는 ‘28’을 정리해야 겠다. 정유정 작가 책은 빨리 아웃풋을 내놓지 않으면 이상하게 다른 책을 시작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내용 자체가 벅차올라서 그런걸까? 빨리 이걸 내려놓아야 다른 책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정체불명의 전염병으로 화양시에 갇힌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 재형

김동욱

  

<꿈의 나라>에는 버림받은 개들에게 청춘을 헌정한 수의사가 있었다. 10대 소녀의 목덜미처럼, 수줍고 여린 인상이었다.

외면은 여려 보이지만 내면은 강인하고 단단한 재형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누가 있을지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처음에 박정민이나 최우식을 생각했는데, 후반부에 강아지와의 연대, 윤주와의 케미 등을 생각했을 때, 윤주의 모성애를 자극할 사람이 필요했다. 박정민은 뭔가 어울리지만 모성애를 자극할만한 느낌이 안 들었는데, 김동욱은 왠지 나이가 들어도 그 무언가 슬픔이 묻어있다. 뭐… 각설하고, 가상캐스팅은 소설읽는 가장 큰 재미라 그런지 말이 많다.

재형은 알래스카에서 개썰매를 끌던 썰매꾼이었다. 그는 ‘아이디타로드’라는 세계 최대의 개썰매 경주를 하다 사고가 났다. 그 사고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재형과 그의 개들은 낙오되었다. 그 때, 늑대무리들이 재형과 재형의 개들에게 다가왔고, 재형은 자신의 아끼는 개들을 늑대밥으로 바친 뒤 19시간만에 구출되었다. ‘마야’는 자신의 오랜 파트너인 개였는데, 자신의 자식들이 늑대밥이 된 것도 모른채 실종된 재형을 찾아내었다. 그 후 얼마 못 가서 마야는 죽고 말았다.

  재형은 한국에 돌아 왔고,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돌아 개와 사람이 모두 빨간눈 되어 이틀만에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고향이었던 ‘드림랜드’로 돌아왔다. 드림랜드엔 길잃은 강아지들이 북적한 곳이다. 그 곳에서 수의사의 삶으로 시작하려 했지만 전염병 때문에 드림랜드에 있는 개 반 이상이 죽어나갔다.

재형은 ‘마야’로부터 느꼈던 죄책감을 ‘링고’를 구원함으로써 벗어나려고 했던 것 같다. 재형은 전쟁통 속에서도 윤주와 사랑에 빠졌기 아마도 살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지난 ‘아이디타로드’ 경주로부터 자신의 개들에게 늑대와 싸울 기회조차 주지 않고 늑대밥으로 줘버렸던 그 기억과 자신의 딜레마 때문에 ‘박동해’와 ‘박남철’ 모두 죽게 만들어 버린 것이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링고’가 기준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렇게 필사적으로 막았던 것 같다. 기준은 자신을 살려줬다고 생각하겟지만 재형은 자신의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 윤주

경수진

  성공하고 싶지만, 진실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와 어울릴지 아주 많이 고민했다. 윤주의 역을 경수진 배우가 맡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윤주는 지리산 촌닭집 딸이 출세해서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왔다. 어느 날, ‘박남철’이라는 남자 이름으로 ‘재형’에 대한 악의가 담긴 기사를 써달라는 요청이 왔다. 윤주는 그 기사를 쓰긴 했지만, 오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제보자가 있어서 ‘재형’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윤주는 결국 재형의 드림랜드에 가서 눈 먼 아이 승아를 돌봐 주면서 재형과 함께 몇 날 며칠을 동고동락했다. 그녀는 전염병에 대한 기사를 써가면서 재형, 승아, 드림랜드의 개들도 같이 돌보아 주었다. 하지만 드림랜드의 개들은 모두 군인들에 의해 몰살 당하고, 얼마 뒤 ‘동해’의 습격으로 드림랜드의 모든 것이 활활 타버린다.

윤주는 기자의 눈을 가졌다. 윤주는 재형을 바라볼 때 뜨겁지만 기준과 동해를 바라볼 때나 몰살당한 개들을 바라볼 때, 그녀의 시선을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정의로움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녀가 재형의 무덤에 가서 노란 연을 달아주며 인간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라면 축복을 해주며 돌아간다. 그녀는 그렇게 돌아가서 아마도 재형의 희생, 링고가 가진 복수 의미, 기준의 상황 등의 진실을 풀어낼 열쇠가 될 것 같다.


# 기준

최원영

  눈에 넣어도 안 아픈 토끼같은 딸과 아내랑 오순도순 살고 있었던 소방관 기준에게 비극이 벌어졌다. 차라리 전염병으로 자신의 아내와 딸이 죽었으면 한결 나았을까? 기준의 신신당부로 아내와 딸은 집 안에만 있었는데, 딸이 갑자기 눈이 빨개져 아파져버린 바람에 아내는 기준이 있는 소방서로 뛰어가려다 개떼를 만나서 목 부분을 물려 죽는다. 딸은 당연히 전염병으로 죽게 되었다. 기준의 아내와 딸을 발견한 수진이 기준에게 그들의 사망소식을 조심히 전해 주었다. 

 기준의 아내를 물려 죽인 개는 다른 개였지만, 기준은 그 당시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링고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링고를 죽이려 했는데, 링고를 지켜주려던 스타가 대신 죽어버렸다. 기준에겐 다 똑같은 개새끼였을 뿐이다. 링고는 스타를 죽인 기준에게 복수하려고 했는데 재형이 제때 링고를 찾아 나섰고, 링고의 공격을 막아줘서 기준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기준은 재형의 무덤을 찾아가서 재형에게 고마움 반, 원망 반을 섞인 채로 돌아간다. 

 


# 수진

심은우

 박남철이 운영하고 있는 병원의 간호사다. 단연코 수진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이 아픈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다행히 항체가 있는것인지 그 원인 모를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다. 가장 가까웠던 간호사 동기의 장례식에 갔을 때도 수진은 그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며 동기의 어머니에게 원망을 들었다. 사람들은 계속 병원에 찾아오고, 병원에 남은 인력은 줄어들고 그녀는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들을 케어해왔다. 

 그렇게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처럼 자리를 지켜왔던 그녀도 가족이 있었다. 아버지와 쌍둥이 동생 '현진'의 생사가 너무 궁금했다. 병원엔 줄줄이 사망선고를 받은 시체들이 쌓여져 가는데, 자신의 가족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들이 살아있다는 희망만으로 버티고 싶었다. 기준이 도울 일이 생기면 뭐든지 하나는 꼭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의 생사를 알고 싶다고 했다.

 수진은 자신이 원래 살고 있던 집으로 돌아갔고 약 일주일 가까이 매일 저녁 기준은 아버지를 찾고 있는 진행상황을 꼭 알려주려 찾아왔다. 어느날 수진 혼자 아파트에 있다는 걸 알아챈 20대 남자 무리들에 의해 강간과 폭행을 당해 버렸다. 수진은 그렇게 몇 해 전 죽은 어머니의 곁으로 따라가기 위해 정처없이 걷다가 군인들에 의해 총을 맞고 길거리에서 죽었다. 그런 수진을 본 기준은 그녀를 아버지의 곁으로 잘 묻어주었다.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던 나이팅게일이었던 수진에게 돌아온 것은 잔혹함 뿐이었다. 왜 세상은 그녀에게 이렇게 잔혹했던 것일까? 그녀는 의료,구호물품을 가지러 가는 사이에도 강도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물품을 뺏길 뻔도 했었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텨왔다. 혹시 아버지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쌍둥이 동생 '현진'이 살아있다는 소식이라도 들었더라면, 그녀는 살 의지가 있었을까? 



# 동해

장률

<종의 기원>의 마지막에 정유정 작가가 언급했던 악인 '동해'가 가장 궁금했다. 동해는 상처입은 영혼을 가장한 신박한 또라이였는데, 뭔가 넷플릭스 시리즈 <마이네임>에서 나왔던 '도강재' 캐릭터가 생각이 났다. 동해는 박남철의 둘째 아들인데 형과 여동생은 잘났는데, 동해는 뭔가 늘 집안에서 겉돌았다. 자신에게 엄하게 대하기만 했던 아버지 박남철을 복수할 때, 박남철의 개를 때리거나 죽이곤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해는 박남철의 개 쿠키를 죽이려고 외진 동네로 끌고 갔는데, 어떤 아이의 신고로 재형이 쿠키를 구해줬다. 그리고 재형은 박남철한테 가서 동해가 한 짓을 얘기해주고 쿠키를 자신한테 파양하라고 했다. 그래서 박남철은 동해를 엄청 두들켜 팼다. 동해는 그 때부터 쿠키와 재형에게 할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재형이 알래스카에서 돌아왔을 때, 동해는 그가 생각한 복수를 하기 위해 쿠키를 납치하려고 했는데, 쿠키가 아닌 스타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스타의 남자친구인 링고가 동해의 친구를 절벽에 밀어 죽였고, 동해는 그 길로 도망쳤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동해의 가족은 동해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는데, 동해는 도망가서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정신병원을 불태웠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자신의 집도 불태워서 어머니를 죽였다. 또 '드림랜드'를 전부 불태워서 재형이 돌보고 있던 아이 승아까지 죽였다. 동해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죽이려고 다시 불타버린 예전 본가로 돌아왔는데, 동해의 냄새를 맡은 링고가 동해를 물어 죽여 버렸다.

 동해는 너무 끔찍한 악행을 했는데, 동해가 다시 착해진다던지 깨우친다던지 뭐 이런 서사가 없어서 좋았다. 그런 서사를 갖고 이해를 하기엔 동해는 너무 끔찍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받지 못 했던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받았던 시절들을 회상하는 부분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 부분에 복수를 선택하느냐, 아픔을 딛고 일어나느냐는 본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통쾌했던 부분은 아무래도 동해가 링고한테 물려죽었던 일이 아닐까 싶다. 


# 링고

 아니, 개의 시선을 읽는다고? 근데 하필 재형의 개 중 쿠키, 스타, 마야도 아닌 링고의 시선이었다. 링고는 일반 가정집에 입양됐는데, 자꾸 커져가는 몸때문에 파양당했다. 그 이후로 투견장에 끌려가서 다른 개들과 싸움을 벌여야 했고, 계속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어느 날, 개장수가 전염병에 걸려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마자 링고는 저 멀리 도망치다 스타를 만나게 되었다. 링고는 다른 개는 물론, 사람을 절대 믿지 않는다. 그에게 자유가 생기자마자 묶여 버리고 싶은 누군가가 스타가 되었다. 

 동해가 잘못 납치해서 스타를 죽일 뻔 했고, 기준은 아예 스타를 도끼로 찍어 죽였다. 링고에겐 딱 두 종류의 사람만 남았다. 스타를 죽이려고 했던 자와 스타를 죽인 자. 링고에겐 그 복수만이 그가 목숨이 붙어있는 이유였다.






정유정 작가 글을 읽으면 왠지 모르게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 <바스터즈:거친녀석들>, <장고>가 생각이 난다. 이 사람이 죽을리가 없는데, 하면 죽는다. 이 사람이 이렇게 죽을리가 없는데, 하면 이렇게 죽는다. 예상을 뛰어넘는 죽음이지만 임팩트가 강렬해서 의미있는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감독이 쿠엔틴 타란티노인데, 이상하게 <28>에서 정유정 작가가 쿠엔틴처럼 보여졌다. 오히려 이 책은 전염병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어떻게보면 현실적 반, 비현실적 반과 같은 죽음일까? 하지만 저들의 죽음의 의미있는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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