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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행복의 지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을 찾아 떠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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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있는 장소가 우리의 사람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장소'라는 말은 물리적인 환경뿐만 아니라 문화적 환경도 가리킨다. 우리는 문화라는 바다 속에서 헤엄친다. 이 바다가 워낙 침투력이 뛰어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바다에서 나오기 전에는 그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말을 통해서 우리는 지리와 행복을 잠재의식적으로 통합한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 나선다거나 만족을 찾는다고 말한다. 마치 제대로 된 지도와 항해술만 있다면 찾아갈 수 있는 장소가 지도상에 실제로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https://youtu.be/OmJZpsI0Wn8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이후, 철학에 가깝게 만들어준 믿고 보는 작가 '에릭 와이너'를 TED에서 강연하는 것을 봤다. 그는 내가 어느 장소에 있느냐에 따라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그가 쓴 책 <행복의 지도: The Geograpy of Bliss>라는 책이 너무 궁금해졌다. 목차를 보니 네덜란드부터 시작해서 미국까지 총 10개국을 여행하며 '행복'이라는 정의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행복이란 느낌은 시간과 공간을 제약을 받지 않는 감정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글은 흥미롭다.

# 네덜란드: 행복은 끝없는 관용에서 온다.
작가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가서 "루트 벤호벤"이라는 행복 연구 교수를 찾아갔다. 행복에 대한 연구는 어느 나라가 행복한지(보통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한 편에 답한다고 한다), 어떤 행위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지(행복한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더 크다고 한다), 학력·성향·종교 등의 특징을 가진 사람이특별한지에 대해 연구를 했다. 하지만 에릭이 알고 싶었던 행복은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가 아니라 어떤 곳에서 무슨 이유로 행복을 느끼는가다. 에릭은 벤호벤 교수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고, 벤호벤은 정확한 답은 줄 수 없어도 자신의 데이터베이스를 맘껏 이용해도 된다고 허가한다.
네덜란드하면 세 가지가 마약, 성매매, 자전거 타기 가 떠올랐다. 일단 에릭은 네덜란드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행복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유명한 세 가지를 하려고 하자 걸리는 것이 있다. 자전거를 타기엔 너무 추운 날씨였고, 성매매가 합법인 나라일지언정 성매매를 하면 아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마약이었다. 그는 '커피숍'이라는 명목 아래 마약을 합법적으로 판매하고 있는 우아한 마약굴을 방문했다. 그는 괴로움이란 없고 오로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엄청나게 훌륭한 신경심리학자들'이 사람의 뇌를 자극해서 기분 좋은 경험을 유도하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가정해보자. 부작용도 전혀 없고, 건강에도 해롭지 않은 안전한 방법이다. 이 기계를 이용하면 평생 동안 끊임없이 즐거움을 경험할 수있다.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하겠는가? 이 경험 기계에게 자신을 연결하겠는가?
만약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건 즐거움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노직은 주장했다. 우리는 행복을 성취하고 싶어 하지, 그냥 행복을 경험하기만 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냥 행복을 경험하기만 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심지어 불행을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적어도 불행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어 하는 것 같기는 하다. 행복을 진심으로 음미하기 위해서.

에릭은 로테르담 센트럴에서 스위스를 향하는 기차르 타고 문득 깨닫는다. 네덜란드의 시골 풍경이 지나자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 모든 자유로부터 해방된 느낌, 관용은 훌륭하지만 쉽사리 무관심으로 변질 될 수 있고, 내가 언제 자유를 멈춰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에릭의 의견과 일치한다. 네덜란드에서 동성애 결혼, 마약, 성매매 모든 것의 자유를 인정받는다. (동성애 결혼은 제외하고) 마약과 성매매 등의 자유에 대한 관용을 베푼다는 의미는 아마도 그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네덜란드인들이 느끼는 행복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다는 것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에릭은 너무 많이 주어진 관용에 부담을 느꼈다. 나는 부담은 없을 것 같다. 왜냐면 나는 나 스스로 조절할 수 있으니까. 다만 그렇게 많이 베푼 관용에서부터 행복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 스위스: 행복은 조용한 만족감이다.
스위스를 여행하기 전, 에릭이 생각하는 스위스 사람은 능률적이고, 꼼꼼하고, 조용히 만족하는 이미지다. 스위스 사람을 생각하면 쇼펜하우어가 생각난다고 한다. 행복이 정말로 불행의 부재를 뜻하는 거라면, 스위스인들이야말로 행복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행복이 그 이상의 것이라면, 기쁨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면, 스위스의 행복은 린트 초콜릿처럼 짙은 어둠 속에 잠긴 수수께끼다.
스위스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원인은? 깨끗함, 겸손함, 규칙, 자연과 함께 하는 삶, 안락사... 이 것은 스위스 사람들의 특징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근원일 수도 있다. 스위스 사람들은 자연과 동화된 삶에 감사함을 느끼고, 그 자연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돈이 많지만 다른 나라가 시기심을 느낄 수 있음에 가진 것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함을 유지한다. 어느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나도 크게 기뻐하지 않고, 적절하게 만족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삶의 끝을 선택할 수 있다. 어떻게 적절한 만족감이 행복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예전에 읽었던 <LA GOM>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스웨덴 사람들은 모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유지하는 삶을 유지한다. 스위스 사람도 같은 맥락으로 적절함을 유지하는 것 같다. 원래 중간이 가장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삶의 적절한 만족을 누리는 것은 삶의 안정적이고,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무래도 돈이 많은 나라 사람들은 가진 것이 많다보니 적절함의 조절을 통해 얻는 행복감이 큰 것 같다.
솔직히 가진 것은 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스위스와 비슷한 것 같다. 특별하지 않아도 오늘 이렇게 내가 무난하게 내 삶이 굴러갔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함을 느낀다. 그래도 아직 나는 한국에 있기 때문에 수많 은 비교의 늪에서 헤어나오는게 쉽지는 않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안정감에서 찾아오는 것 같다. 그리고 간간히 도전하는 변화 정도? 두 번째 나라만에 이미 나의 행복의 정의를 찾아버린걸까?

스위스인들의 행복을 표현할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다. 단순한 만족감보다는 크고, 완전한 기쁨보다는 조금 덜한 표현. 혹시 '만족기쁨?' 그래, 스위스인들의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완전한 만족기쁨. 즐겁지만 들뜨지 않은 상태를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즐겁다고 말할 때, 사실은 지나치게 흥분한 경우가 아주 많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에는 광적인 측면이 있다. 패닉과 약간 비슷하다. 우리는 그 순간이 갑자기 끝나버릴까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든든한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 초월적인 순간이나 황홀경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조금 덜한 것, 스위스 같은 것을 말하는 거다.
바닥 청소를 하거나, 쓰레기를 분류하거나, 밥 딜런의 CD를 오랜만에 듣는 것처럼 평범한 일을 하면서 만족기쁨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스위스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지는 몰라도, 만족기쁨을 느끼는 법은 분명히 알고 있다.



# 부탄 : 행복은 국가의 최대 목표다

낙원은 선택된 사람들만의 클럽이다.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와 마찬가지다. 비즈니스 클래스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데에는, 운이 없어 그곳에 타지 못하고 저 뒤의 이코노미 좌석에서 질긴 닭고기를 징겅거리고 자그마한 병에 나오는 보드카로 감각을 마비시키려고 잔돈을 찾아주는 주머니를 뒤지는 사람들의 존재가 적잖은 역할을 한다. 비즈니스석에 앉아 있으면 그 가엾은 사람들이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커튼이 거기 왜 달려 있겠는가), 그 사람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둘 사이의 차이를 실감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에릭이 방문했던 "부탄일기"를 읽어보면, 마치 신비의 나라에 방문했다가 꿈에서 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들은 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넉넉하게 사는 형편도 아닌데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다른 개발도상국의 나라를 가보면 겉은 화려하고 안은 부실한데, 부탄은 겉보다 속이 인상적이라고 한다. 부탄은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을 찾아갈 수록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주장한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과 똑같이 살 것이다.
내 생애의 모든 순간,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 지금까지 했던 여행, 내가 이룩한 성공, 내가 저지른 실수, 내가 겪은 불행이 모두 내게 딱 맞았다. 그것들이 전부 좋았다거나,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난 저속한 숙명론 따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들은 모두 내게 딱 맞았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깨달음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맥 빠진 소리라는 사실은 나도 안다. 괜찮다는 말은 행복을 뜻하지 않는다. 새로운 종교나 자기계발 운동의 기반이 되지도 못한다. 이 정도로는 나는 오프라 윈프리가 나를 초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은 출발점이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고맙다.
내가 부탄에 온 덕분에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해도 될까? 잘 모르겠다. 부탄은 샹그릴라가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곳은 묘한 곳이다. 여러모로 독특한 곳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평상시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갑옷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운이 좋다면, 빛줄기 몇 개가 새어들어올 수 있을 만큼 금이 넓어질 수도 있다.



# 카타르 : 행복은 복권 당첨이다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 말했던 '부탄'을 거치고, 부자들만이 사는 나라 '카타르'로 떠나보았다. 에릭은 혹시 돈이 진짜 행복을 만들 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비행기도 비즈니스석을 타고, 포시즌즈 호텔에 묵는다. 비즈니스석엔 아무도 없었다. 왜냐?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하는 카타르 부자 클래스~ 짧은 시일 내에 부유해진 졸부의 나라, 카타르는 사람들의 생활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수명도 길어지고, 건강도 좋아지고(비만도 심각), 교육 수준도 높아지고, 마음만 먹으면 해외여행도 다닐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오만과 불안감이 뒤섞인 태도를 갖고 있다.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남들의 인정이다.

하지만 여기의 이 훌륭하기 그지없는 호텔, 내게 뭔가 필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직원들이 알아서 즉시 대령하는 이 호텔에서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걸까? 얼마 뒤 어떤 단어 하나가 퍼뜩 머리에 떠오른다. 지금 내 주위 환경을 감안하면, 참으로 뜻밖의 단어다. '무덤'이라니. 그래, 맞다. 이 호텔은 아주 훌륭하고, 고상한 설비를 갖추었으며, 온도와 습도가 잘 조절되는 무덤이다. 무덤은 죽은 사람을 위한 곳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카타르 사람들이 퉁명한 이유는 '사막'이라는 환경 조건에서 시작된다. 지금이야 원하는 대로 물을 마실 수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 더위에 짜증없이 물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카타르에는 문화가 없다. 수천 년 동안 사막에서 근근이 살아가며, 수시로 침략해오는 수많은 부족은 물론이고 무서운 더위와도 싸움을 벌이다 보면 문화를 가꿀 시간이 없을 것이다. 예전에 카타르 사람들의 삶은 문화를 가꿀 수 없을 만큼 가혹했지만 지금은 문화를 가꾸기에는 삶이 너무 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타르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한 남자는 말한다. 이슬람을 믿으세요! 신을 믿고 모든 것이 신의 손에 달렸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보다 행복하다고 한다. 그럼 알라를 믿기만 한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인가?

카타르는 천연자원의 복권에 당첨된 운이 좋은 나라다. 잠깐의 행운은 기분이 좋을 수 있지만, 그 행복이 영원히 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에릭은 카타르에서 돈으로 느낄 수 있는 약간의 행복만을 얻어간 것 같다.

브릭먼은 복권 당첨자들의 경우 옷을 사거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등 일상적인 일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크게 줄어든 것 같다고 추측했다. 예전에는 즐거웠던 일이 이제는 즐겁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쾌락의 트레드밀'이라고 부른다. 트레드밀이 원래 그렇듯이 쾌락의 트레드밀 역시 수고스럽기 때문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피해야 한다. 하지만 보통 트레드밀과 달리, 쾌락의 트레드밀은 결코 건강에 좋지 않다. 쾌락과 적응이 무한 반복되는 트레드밀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재미있는 것은, 쾌락의 트레드밀에 두 가지 눈에 띄는 예외가 있다는 점이다. 소음과 큰 가슴.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소음에 아무리 오랫동안 노출되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못한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서는 가슴 확대 수술을 받은 여성들이 그 덕분에 경험하게 된 즐거움에 결코 질리는 법이 없음이 밝혀졌다. 그들의 파트너도 아마 그 여성들과 같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말이 옳았다. "약간의 행운은 우리 삶의 행로를 방해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 아이슬란드 : 행복은 실패할 수 있는 기회다

아이슬란드는 춥고 어두운 나라지만 이상하게 행복지수가 높다. 음울하고 어두운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을까?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글과 예술을 좋아한다. 정부에서 예술가에게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배고픈 예술가를 경험해 본적이 없다. 그들의 글이 엉망이더라도 엉망 또한 좋은 예술의 밑거름이 될 것을 서포트해주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특정한 날을 제외하고 절대 와인 한 잔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음울한 날씨를 술로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조절하는 것인가?

제러드는 땅에서 지열이 만들어낸 황금처럼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걸 좋아한다.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커피나 마시러 오라며 남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특별한 화제가 없는데도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떠는 것도 좋아한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애정 담긴 목소리로 자기 나라를 '얼음 덩어리'라고 부르는 모습도 좋아한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국회의원 세 명의 이름을 금방 외울 수 있다는 점도 좋아한다. 상쾌한 겨울날 발밑에 밟히는 눈이 천국에서 만든 스티로폼처럼 사박사박 소리를 내는 것도 좋아한다. 12월에 시내 중심부의 쇼핑가에 늘어서는 성가대도 좋아한다. 강하고 눈부신 그들의 목소리가 밤을 돌려놓는다. 다섯 살짜리 아이들이 새까만 어둠 속에서 혼자 학교까지 걸어가도 안전하다는 사실도 좋아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와중에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의 마술 같고 초자연적인 느낌도 좋아한다. 차가 눈 속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게 됐을 때 항상 누군가 차를 멈추고 도와준다는 사실도 좋아한다. 비행기가 케플라비크의 국제공항에 내려앉으면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그저 집에 돌아온 게 기뻐서 박수를 치는 것도 좋아한다. 그리고 물론 어둠도 좋아한다. 그는 어둠을 그냥 견디는 수준이 아니라 진심으로 좋아한다.
하지만 제러드가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건 사람을 틀에 가두지 않는 문화, 아니 적어도 사람이 이 틀에서 저 틀로 자유로이 오갈 수 있게 해주는 문화 속에서 사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힐마르라는 이교도가 한 말이 있다. 우울한 기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약간의 우울증을 잘 보살피면, 그 덕분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자신을 뚝 꺾어버리면, 삶이 얼마나 연약한지, 자신은 또 얼마나 연약한지에 안도감이 든다. 아이슬란드에서 행복은 동전의 양면처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동전처럼 동시에 행복과 불행이 진행되는 거라는 표현이 참 맘에 든다. 나의 우울 또한 사랑하는 것.



# 몰도바 : 행복은 여기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만난 루트 벤호벤에 따르면 구소련 공화국인 몰도바는 지구상에서 가장 덜 행복한 나라다. 몰도바는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나라인데, 루마니아어를 쓰고, 러시아어를 쓰는 희한한 나라다. 몰도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돈이 풍족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에릭은 카타르에서 돈이 넘치게 있는 사람들에게서 오는 ‘행복하지 않음’과 돈이 너무 없는 사람들에게서 오는 ‘행복하지 않음’에서 신선함을 느꼈다.

몰도바인들은 1인당 소득은 연간 880달러에 불과하고, 돈을 벌려면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 몰도바인들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인정하지만 몰도바보다 가난한데도 더 행복한 나라는 얼마든지 있다. 나이지리아나 방글라데시가 좋은 예다. 문제는 몰도바인들이 자신을 나이지리아인이나 방글라데이인과 비교하지 않고, 이탈리아인이나 독일인과 비교한다는 것이다. 몰도바는 부자 동네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다.

몰도바 사람들은 절망을 무디게 만들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그럴듯한 이유를 대서 덜 괴롭게 만드는 표현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인기를 끄는 말이 ‘Ca la Modova’ek. ‘여긴 몰도바야’라는 뜻이다. 이 말을 할 때 사람들은 대개 손바닥이 위로 오게 양손을 벌리며 푸념하는 말투를 쓴다. 이 말과 더불어 짝을 이루는 표현으로 ‘Ce sa fac’이라는 것도 있다. ‘내가 뭘 어쩔 수 있겠어?’라는 뜻이다. 몰도바 사람들은 버스가 또 고장 나거나 집주인이 아무 이유 없이 월세를 또 40달러 올려달라고 할 때 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한다.



몰도바 사람들은 사람들을 돕지 않고, 자신의 신세만 한탄하며 시기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자신들이 불리한 위치에 있으며 그것을 바로 고쳐 잡지 않고 무시한다. 몰도바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매우 우울해한다. 그들은 몰도바인처럼 웃음을 잃고 있다. 근데 의외로 어떤 사람은 몰도바에 사는 것이 나름 행복하다고 말한다. 왜냐? 적어도 이 곳에선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역시 상대적 비교만이 나의 만족을 채워주는 것인가?

몰도바의 이야기를 보다가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에릭이 이렇게 찾아다니는 행복은 장소에서 오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 가정, 학교 등에서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제공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가능성을 심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 말이다. 행복은 어쩌면 내가 선택권을 쥐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보기>들 중 어떤 것으르 선택하더라도 후회와 만족은 나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불행을 느끼든 슬퍼하던 내가 감내해야 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지 않을까 싶다. 돈이 너무 많은 카타르는 무한한 선택의 폭에서 무엇도 소중하지 않을 수 있다. 돈이 너무 없고 신세한탄만 하는 몰도바는 좁은 선택의 폭에서 어떤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정말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어떻게 나의 인생을 해쳐 나가야 하는지가 아닐까? 그래서 내 개인의 행복의 정의를 만들어 나가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 4나라가 남았는데, 사족이 길었다.




# 태국 : 행복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행복을 굳이 생각하지 않는 부탄과 비슷한 것 같다. 부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부탄은 약간 차분하다면 이들은 매사에 열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더러운 물은 안에 두고, 깨끗한 물은 밖에 보여라.'라는 속담처럼 태국은 냉정한 가슴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런데 태국의 살인 사건 발생률은 높은 수준이고, 잔인하고 폭력적인 국민 스포츠 무에타이, 잘린 남근을 접합하는 기술이 세계 최고다. 태국 사람들은 '중도'를 강조하는 종교를 믿는데도 확실히 불을 서서히 줄이는 스위치가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딱 세 가지밖에 없다. 긍정적인 감정(좋은 기분)을 증가시키는 것, 부정적인 감정(나쁜 기분)을 감소시키는 것, 아니면 화제를 바꾸는 것. 이 세 번째 방법을 우리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설사 고려하더라도 현실도피라며 무시해버린다. 화제를 바꿔? 그건 문제를 피하는 거지. 비겁한 행동이야! 반드시 문제 속에서 몸무림치면서 그걸 분석하고, 맛보고, 삼켰다가 내뱉고, 다시 삼키고, 이야기해야 한다. 항상 이야기 해야 한다. 당연히. 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말로 포장되어 있다고 항상 믿었다. 태국 사람들에게 이건 낯설고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다. 태국 사람들은 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을 말이 진실의 도구가 아니라 기만의 도구라고 본다.
태국 사람들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다. '마이펜라이'라는 방법. 이건 '신경 쓰지 마'라는 뜻이다. 우리 서구인들이 대체로 화를 내면서 "에잇,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라고 말할 때의 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고민은 그만두고 앞으로 나아가라'라는 의미다. 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이런 사고방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미쳐버린다.



# 영국 : 행복은 좋은 인생의 부산물이다
BBC 프로듀서들이 런던 바로 외곽에 있으며, 히스로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들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한 슬라우라는 마을을 행복한 곳으로 바꿔 놓으려고 한다. <슬라우 행복하게 만들기 Making Slough Happy>라는 제목의 이 시리즈가 방송되었다. 슬라우에서 자원자 50명을 선발해서 일명 '행복 훈련'을 받게 했는데, '행복 체온'을 재고 슬라우 주민들은 같이 태극권도 하고 손도 잡고 요가도 한다. 그들은 12주동안 행복 훈련을 받았는데, 자원자 50명의 행복도가 33퍼센트 높아졌다고 한다. 에릭은 영국에 도착해 <슬라우 행복하게 만들기>라는 DVD를 구해다 보고, 자원자들 몇 명을 인터뷰하러 다녔다.
에릭이 느꼈던 영국인들의 온도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감정 절제하기의 달인이었다. 그들은 미국식으로 구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걸 싫어하고, 사람이 죽어도 전화를 걸어 조의를 표하지 않는다. 왜냐? 그들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에. 너무 시끄럽게 구는 것도 싫어한다. 영국인들이 자기계발서를 읽는다는 것은 저속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이 약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난 괜찮지 않고 넌 더 괜찮지 않아'같은 제목의 책일 거라고 비꼬기도 한다. 어쩌면 괜찮지 않은 우리의 삶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본다. 그래도 영국인들의 이런 시니컬한 태도는 약간 회의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다.
여태껏 에릭이 8개국의 나라의 행복을 연구하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행복이란 '만족'을 나타내는 것일까? 행복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나의 순간의 만족이 행복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행복은 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슬라우를 사랑하지 않지만, 아내를 사랑했다. 여기서,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는 버크셔의 이 마을에서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이곳에 계속 머무른다.
물론 그도 떠날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차마 떠날 수 없었다.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죠. 자기가 사는 곳이 거기니까." 이 마지막 말이 내게는 심오하게 들린다. 맥주 때문에 어지러워진 머리로는 그 이유를 콕 집어낼 수 없지만. 휘청휘청 호텔로 돌아가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서 아주 깊이, 슬라우처럼 깊이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에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가 와 닿는다.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죠. 자기가 사는 곳이 거기니까.' 이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진실,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이 있는 곳이 바로 집이라는 사실을 제프리가 전혀 준요하지 않은 얘기를 하듯이 영국식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 인도 : 행복은 모순이다

인도는 그들이 말하는 것들이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그런 나라다. 그들은 신을 믿고 있지만 약간 본인들이 내키는 대로 시시때때로 바뀌곤 한다. 오늘 그들이 ‘yes’일지라도 내일 ‘no’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인도다. 에릭은 인도에 있는 동안 커피를 한 잔도 마시지 못했다. 일단 에릭은 커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몽롱하고 예민한 정신으로 인도를 관찰했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에릭은 인도에서 현명한 구루, 사기꾼 구루. 이 모순적인 두 가지의 생각이 인도인의 머릿속에서 편안하게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약간 인도인들이랑 잘 맞는 것 같다? 내가 그 바로 유명한 자기합리화의 달인인데! 아마도 내 머릿속엔 무수히 많은 구루들이 존재하는가 보다.


“어떤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부르는 걸 우리는 신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부르기로 하죠. 똑같은 일을 열 번이나 했는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가, 11번째에 효과를 발휘합니다. 이 우주 전체가 우연과 확률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모든걸 받아들입니다.”
또다. 삶의 모든 것이 마야, 즉 환상이라는 힌두교의 믿음. 일단 삶을 게임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러니까 그저 체스 게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이 훨씬 가볍고 행복하게 보인다. 개인적인 실패는 “극단의 여름 공연에서 실패자 역할을 하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 된다. 휴스턴 스미스가 <세게의 종교>라는 저서에서 쓴 말이다. 만약 모든 것이 연극과 같다면, 우리가 맡은 역할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그저 자신이 연기할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가 인식하기만 한다면. 앨런 워츠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인간은 자신이 한바탕 연극이며 아주 기운차게 그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에릭은 행복이 미꾸라지 같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행복에 이렇게 집착했었지? 에릭이 행복의 지도를 썼다길래 요근래 잠시 행복에 대해 같이 탐구하고 고민해 봤던 것 같다. 이 정도면 좋을 책인 것 같다. 에릭이 행복에 대해 연구한 덕분에 내 인생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원하는 것이 다가오기 직전의 만족인 것 같다. 아니? 더 이상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 생각하지 않으련다. 왜냐? 행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진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처럼 느껴진다. 꾸준하게 실패도 하고, 꾸준하게 불행하며, 꾸준하게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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