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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종의 기원, 정유정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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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의 기원>은 2016년에 출간되었는데 마치 저 표지에 적힌 문구처럼 심장이 뛰어 버렸다. <7년의 밤>을 마치고 아직 남은 <28>과 <종의 기원>을 어떻게 맞이하면 될지 벅찼다. 정유정 작가의 <내 심장을 쏴라>, <진이, 지니>,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마저 더 읽어야할지 고민이 생겨 버렸다. 나는 <28>을 마무리로 김초엽 작가 컬렉션에 집중을 하려고 했는데, 정유정 작가의 머리에서 끄집어 낸 그 작품들이 너무 궁금하다. 일단 <28>을 읽고나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 가상캐스팅

송강(유진), 이도현(해진), 이미연(유진의 엄마)

 가상캐스팅을 먼저 꺼낸 이유는, 이 책은 사이코패스 유진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가 저지른 일들을 감당하려면 최소한... 유진은 잘생겨야 말이 된다. 유진은 184cm, 78kg의 남자이고, 차분한 성격에 속을 영 읽을 수 없는 사이코패스로 표현이 된다. 그가 저지른 불과 이틀만에 저지른 3건의 살인을 설명하려면 적어도 송강이어야 그나마 이 서사를 읽어줄 수 있는 것이다. 

 해진을 상상할 때는 적어도 송강과 덩치가 비슷해야 했고, 이전에 <스위트홈>에서 둘의 케미가 꽤 좋았던 것으로 기억돼서 이렇게 붙였다. 사실은 이렇게 미리 역할을 지정하지 않으면 구체적인 상상이 어렵다ㅋㅋㅋ 유진의 엄마는 이미연이 맡았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는 단호하지만 눈빛은 서글픈 마스크는 이미연 말고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면 소설을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게으른 가상캐스팅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연으로 잘 감상했다. 

 

 

# 이틀동안 벌어진 3건의 살인

 유진은 뻔뻔스럽게도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지 않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집중하고 있다. 심지어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도 전혀 슬픈 기색이 없고, 당혹감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내려갔을 때, 어머니의 턱 밑에 날카로운 무언가로 베어 갈라진 아가미같은 형상을 보았다. 그는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 고민하다가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진은 새벽 2시 반에 밖에 나갔다 돌아왔는데 어머니는 현관문 앞에서 유진을 기다리고 같이 죽자고 다그쳤다. 그러다 몸싸움을 하고 유진이 10살 때 죽은 아빠의 면도칼로 어머니의 목을 그어 죽였다. 

 유진은 어머니를 살인했던 것을 상상하다 어머니는 왜 그 시간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또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와 정신의학과 의사인 이모로 인해 항상 약을 먹었다. 그 약을 먹으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머리가 개운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 중간에 약을 끊을 때마다 기가 막히게 머리가 맑아지고 자신이 제어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는 보상으로 가끔씩 몰래 약을 끊었다. 유진은 해진이 일하고 있는 현장 자켓을 입고 어두운 밤에 여자들의 뒤를 쫓아 그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것이 자신에겐 '마스터베이션'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어느 날 여자에게 심리적 두려움을 주는 것으로 만족이 되지 않았고, 아버지의 면도칼로 여자의 목을 그었다. 그리고 물가로 던져 버렸다. 그 모습을 어머니가 다 지켜보고 있었다. (유진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라텍스 장갑과 면도칼을 준비하고 나간 것인데, 살인을 계획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것을 당연하게 준비할 수 있지? 그는 사냥꾼이었다.)

 하루동안 어머니와 연락이 되지 않자 무슨 일이 난거라 확신한 이모가 유진의 집에 찾아왔다. 이모는 집안을 뒤지다 유진의 엄마이자 그녀의 언니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유진은 그 자리에서 이모의 목을 그어버린다. 유진이 이모의 목을 그었을 때쯤 이모에게 충분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고, 그녀를 한낱 방아깨비에 비유를 했다. 사실 유진은 수영선수가 되고 싶었는데, 이모가 사이코패스 중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에 속한다는 진단을 내린 후에 수영은 물론, 제한되고 억압된 삶을 살고 있었다. 죽은 어머니의 일기 혹은 메모를 보고 알게 된 사실이었다. 두 여자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거침없이 이모를 죽이고, 어머니의 왼편에 삼등분해서 두었다.

 

 

# 절묘한 타이밍

 유진에게는 유민이라는 한 살 터울 형이 있었고, 형과 딱 12개월 차이가 나서 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였으나 둘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유민은 말이 많고 어디에서나 사랑받는 타입이라면 유진은 차분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디서나 눈에 띄는 아이였다. 가족여행을 갔던 어느 날, 유민과 유진은 서바이벌 게임을 하다 유진은 자신의 뚜껑을 열리게 한 유민을 발로 차서 절벽으로 떨어뜨렸다. 그걸 본 유진의 아빠는 바다로 다이빙을 했고, 유민과 아빠는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진의 엄마는 유진이 유민을 절벽으로 떨어뜨린 현장을 목격했고, 유진이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죽인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하나 남은 자식을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고, 같은 반 아이 중 해진을 만났다. 해진은 유민과 판박이었다. 해진은 할아버지 손에 키워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유진의 엄마는 해진을 입양해서 유민의 자리를 대신 채우기로 했다. 유진의 엄마만 해진이 좋았던 것이 아니다. 유진 또한, 가끔 자신의 일탈을 도와주고, 정말 형같이 느껴지는 해진이 좋았다.  매일 억압된 삶을 살았던 유진을 위해 학교를 빠지고 당일치기 여행을 했다. 그 때 서로의 버킷리스트를 쪽지에 쓰고, 서로 바꿔서 동시에 열어 보았다. 

요트를 타고 1년동안 바다를 떠도는 것.
리우데자네이루 파벨라에서 크리스마스를 맞는 것.

 유진은 바다를 떠돌면서 평생 못 누려왔던 자유를 느껴보는 것이고, 해진은 영화 '시티 오브 갓'의 배경에 가서 크리스마스를 누리는 것이라고 했다. 유진은 세 여자를 죽이고 자살과 자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옵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망을 가려고 준비를 하다가 그 때 그 '버킷리스트'가 떠올라서 해진을 위해 6개월 짜리 리우데자네이루행 오픈티켓을 사주었다. 늘 유진이 여행을 갈 때마다 티켓을 끊었기 때문에 해진의 아이디로 하는 것은 일이 아니었다. 

 해진이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 어머니와 이모의 차는 지하주차장에 그대로 있는데,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 갔냐며 걱정도 안되냐며 유진을 추궁했다. 유진은 해진이 자신의 편일거라 생각하고 2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 설명했다. 해진은 유진의 얼굴을 피떡이 되도록 팼고, 자수하러 가자고 했다. 그래서 해진이 운전대를 잡고 유진을 데리고 경찰서로 향했다. 유진은 해진에게 마지막으로 전망대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해진은 그 말을 들어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경찰차가 뒤에서 쫓아왔다. 유진은 해진을 압박하며 차를 바닷가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수영을 못하는 해진은 바닷물에 가라앉아 죽었고, 유진은 수영해서 멀리 멀리 달아났다. 

 

 이후 1년, 바다를 떠돌았다. 배밑바닥에서 자고, 밥을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새우잡이를 거들면서 이른바 '노예 생활'을 계속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 
 세간에서 그 일은 '면도칼 살인 사건'으로 회자됐다. 범인으로 지목당한 해진은 이름 대신 '칼잡이'로 불렸다. 경찰은 '자신이 입양한 어머니와 어머니의 여동생, 길 다던 여자를 죽인 후 남동생까지 죽이고 해외로 도피하려다 실패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 같으 결론을 내린 데는 몇 가지 근거가 있었다. 해진의 청바지에 들어 있던 면도칼, 옥상 퍼걸러 테이블에서 발견된 '과외' 재킷, 어머니의 카드로 예약된 리우데자이루행 항공권. 더하여 나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서 손을 묶고, 차에 태운 후, 해상공원으로 끌고 가는 걸 봤다는 이웃 주민이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증거들은 모조리 해진을 가리켰던 셈이다. 

 

 

# 작가의 말

 이제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분신 유진이 미미하나마 어떤 역할을 해주리라 믿고 싶다. 

 

 작가는 이 책을 쓰면서 세 번이 부수었다고 표현했다. 악인을 등장시킬 때,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 한계가 있어서 스스로 '나'가 되기를 택했던 것이다. 악인의 서사를 이렇게 읽으면서 나는 그 악인이 정말 악한건지 아니면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유정 작가는 정말 '나=악인'을 잘 표현한 것이 아닐까? 나는 전혀 피해자에게 감정 이입을 하지 않고, 유진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서 그가 저지른 살인을 들키지 않기를 조마조마하며 읽었다. (그래도 해진이 모든 것을 다 뒤집어 씌어진 채 죽은 것은 안타까웠다.) 

 결국 유진은 자신의 버킷리스트인 1년동안 요트를 타고 바다를 떠도는 것을 이뤘다. 그것이 새우잡이 배였을지언정. 그의 범행은 계획에 없었지만, 기가 막히게 완벽한 범행이 된 것이다. 그는 또 다른 피냄새를 맡고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를 지도 모른다. 그 땐 덮어줄 누군가가 없을텐데, 유진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한 주동안 참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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