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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1), 나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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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포터 (Andrew Porter)

197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자랐다. 뉴욕의 바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아이오와 대학 작가 워크샵에서 예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이오와를 떠날 때쯤 제임스 미치너 펠로십을 받으면서 휴스턴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하루에 여섯 시간씩 소설 창작에 전념하며 소설집 출간 준비를 마친다. 그때가 1999년, 포터는 아직 서른이 안 되었을 나이였다. 하지만 이즈음 도둑을 맞아 집이 털리는 사고를 당하는데 원고를 통째로 분실하고 만다.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쓰려 했지만 정확한 어조와 표현은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몇 년 동안 생계유지를 위해 지역 글쓰기 센터에서 강사를 하는 등 힘든 세월을 겪으며 작가의 길을 거의 포기하기에 이른다. 돌파구는 2001년에 가까스로 메릴랜드 대학에서 방문 작가 자리를 얻으면서 열린다. 다시 작가의 길로 접어들면서 발표한 단편들이 유명세를 타게 되는데, 「아술」은 스티븐 킹이 선정하는 『2007 미국우수단편선집』에 들어갔으며, 「외출」은 푸시카트 상을 받으면서 미국공영라디오에 소개되었다. 주위에선 무엇보다도 돈이 되는 장편소설로 선회하기를 권했으나, 포터는 작가에게는 자신만의 호흡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임을 알았다고 한다.

아이오와 시절부터 혼자 일하는 스타일로 주위 사람들에게 원고를 잘 보여주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 작품마다 일인칭 화자를 꼭 등장시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인물 스스로 목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친밀감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사』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의 화자를 좋아하며, 존 치버와 리처드 포드의 작품을 선호한다고 밝힌다. 2008년에 출간한 처녀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으로 단편소설 부문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했으며, 스티븐 터너상, 패터슨상, 프랭크 오코너상, 윌리엄 사로얀상 최종후보작으로 뽑혔다. 당시에는 조지아 대학 출판부라는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수상 후 2010년 랜덤하우스의 빈티지 출판사가 페이퍼백으로 재출간했다. 이후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 십여 개 국가에서 번역되어 나오면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현재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 살면서 연내 출간을 목표로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며, 트리니티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https://www.yes24.com/24/AuthorFile/Author/141716 ; YES24 앤드루 포터 작가 소개

 

 


01 구멍

그러나 지금도, 십이 년이나 지났는데, 나는 여전히 이런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왜 그 순간 그 봉지가 녀석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는지.
 나이가 들수록, 경험하고 하루이틀 지난 일보다 수년 전에 있었던 일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다고 한다. 그 말은 사실인 것 같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정확한 순간을 더이상 기억할 수 없다. 

 

 '나'의 친구 탈의 집엔 맨홀이 있었다. 탈의 가족은 맨홀의 철제 뚜껑을 들어올려 그 구멍 속에 버리곤 했다. 구멍은 부정한 어떤 것, 하나의 비밀 같아 보였다. 십이 년 전 여름, 7월 중순 어느 날 탈의 형은 탈에게 잔디 깎는 기계를 다룰 수 있게 해주겠다며 탈에게 잔디를 깎게 시켰다. 탈과 '나'는 잔디를 깎고난 뒤, 브래드쇼 씨네 수영장에 가서 놀 계획을 하고 있었다. 탈은 맨홀 속으로 잔디 쓰레기 봉지를 빠뜨렸는데, 어떤 것에 꽂혔는지 모르겠지만 탈은 손전등을 입에 물고 맨홀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탈은 돌아올 수 없었다. 

 탈이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심각한 유독가스 때문이었다. 그렇게 탈을 구하려다 소방관 두 명까지 죽고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탈의 형은 동생들에게 잔디 깎게 시키고 방치하다 탈이 죽게 되어, 충격을 받게 되었고 '나'에게 그 날의 진실을 듣고 싶어했다. '나'는 그렇게 진실이 담긴 장문의 편지를 탈의 형에게 보낸다. 

 

 '나'는 탈이 맨홀에 들어가 죽었던 사건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꿈들을 꾸게 되었다. 왜 자신이 대신 들어가지 않았는지, 왜 말리지 않았는지, .... 자신이 죽게 되는 결말이 담긴 수많은 경우의 수가 담긴 꿈들을 꾸더라도 현실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과거의 슬픈 일을 겪게 되더라도 사는 사람은 살아야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이 책에서 '안녕'이라는 의미는 'bye'가 아니라, 'hello'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는 사람은 어찌 됐건 잠시 잊더라도 살아가지게 된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모를 겹쳐지는 기억 속에서 아픔과 슬픔을 갑자기 한번에 휘몰아 치곤 한다. 우리의 삶은 망각도 주어졌지만, 그 사건의 무게를 짊어질만큼의의 대가도 주어진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뭐, 자신들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맨홀 쓰레기들이 쌓이고 쌓여 유독가스이 발생해, 가족 한 명이 죽는 결말이 어쩌면 권선징악일 수도 있겠지만은... 난 '나'의 입장에서 읽어봤던 것 같다. 내가 주체적으로 나서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희생에 대한 대가, 어린 나이에 얻어진 트라우마 등에 대해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주 짧은 단편이었지만 강렬했던 작품이었다. (가장 첫번째로 읽어서 그런가?) 

 


02 코요테

 

리뷰 내용 대부분이 호의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짧은 문장이 하나 있었다 - 기사 말미의 문장으로, 이 문장에서 그 비평가는 아버지의 영화를 "젊은 천재의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묘사했다. 이후 세월이 흐른 뒤 깨닫게 된 것인데,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단어들과 그것들에 실린 무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엌 식탁에 홰를 친 새처럼 앉아, 만트라를 암송하듯이, 나는 머릿속에서 그 단어들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내가 그 단어들을 충분히 여러 번 말하면, 그 뉘앙스를 모사하면, 분명 모든 것이 그 단어들처럼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알렉스의 아버지는 실패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그 영화는 쇼쇼니 인디언족에게서 보이는 영혼에 대한 믿음, 육체적인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가 아주 긴밀히, 거의 공존하다시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그들의 의식 태도를 다루고 있으며, 어머니 당신이 본 중 시각적으로 가장 놀라운 영화라고 한다. 아버지는 젊은 천재라고 각광받던 한 시점으로부터 영화를 계속 찍게 되었고, 그 영화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때때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때가 많았고, 아버지의 작업실은 지하실에 있었다. 어머니는 변호사였는데, 혼자 알렉스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거 아닌 별거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데이트용으로 짧게 다른 남자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다 이해했다. 어머니는 진지하게 데이트하게 된 사람이 생겼는데, 잘생기고 돈도 많은 데이비드라는 남자였다. 아버지는 처음에 그저 지나가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점점 그들의 관계가 진지해지자 위기의식을 느꼈다. 

 아버지는 텍사스로 간다며 집을 떠났다. 어느 날 집 앞에 아버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차 안에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는 텍사스에 갔던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계속 가족 주변에 머물러 있던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새회사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고, 알렉스는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젊은 날을 회상하면서 보고 있으면서도 그리워 했다. 아버지는 알렉스를 집에 내려주고 떠났다. 
 
 그렇게 떠났던 아버지는 데이비드를 찌르고 경찰에 연행되었다. 
아버지는 어둠 속에 얼굴을 숨기고 좌석 뒤로 몸을 젖혀 기댔고, 남청색 치마를 입은 어머니가 전화통화를 하면서 창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아버지가 성공한 변호사가 되어 있는 어머니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당신이 결혼한 열아홉 살의 아기씨, 버클리대 미대 학생, 학생 시절 찍은 자신의 모든 영화에 등장했던 주인공, 몇 년에 걸친 그의 유일무이한 팀원을 보고 있었다-아버지가 그때 내게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지우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네 인생에 네 엄마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다시 없을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 아버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다른 건 기억하지 못해도 그건 기억해야 해."
 몇 해에 걸쳐 어머니는 내게 여러 가지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버전에서는 아버지가 데이비드를 슬쩍 밀치면서 그를 위협했다. 그러나 다른 버전들에서는 상황이 그보다 폭력적이었다는 암시가 있었다. 좀더 나중에는, 경찰이 와 상황을 수습했고, 아버지가 연행해 갔으며, 데이비는 구급차에 실려갔다고 말해주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젓고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인생 최악의 일이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런 형편이 되어버린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고, 사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난 날의 사랑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뮤즈였던 어머니 자체를 바라보았고, 어머니는 예술가 자체였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결국 아버지는 영화도 사랑도 가정도, 그 무엇도 지키지 못해 잘못된 선택을 두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진지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데이비드가 칼에 찔렸다는 것보다, 아버지의 마음이 그토록 초라해졌던 모습을 봤다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이후 로스엔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심각한 우울증 치료를 받았고, 패서디나에 있는 재활 시설에 머물렀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기억의 잔재로 이어나가는 것 같다. 현실의 벽이 아무리 저 둘을 갈라지게 하더라도, 그들은 웬만해선 갈라지지 않았다. 그들에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더라도, 자신이 채워줄 수 없는 자리를 인정하고 자신과 부인과의 사랑은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게는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위기의식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기억의 잔재를 사라지게 해줄 대체제를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03 아술

 

 

"날카로움을 잃어버린 것 같아." 그녀가 나를 본다.
"나는 표류해. 가끔 강의 시간에 학생이 말을 하잖아. 그럼 눈으로는 그 학생의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고 있지만 그 학생이 하는 말은 듣고 있지 않아. 나는 강의실에 있지만 강의실에 있지 않아. 내 말뜻 알겠어?"

"당신은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한 사람이야."
그러나 나는 내 말이 그녀를 안심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폴과 캐런은 아이가 없는 부부다. 어느 날 캐런은 '아술'이라는 18살 교환학생을 1년동안 같이 지내보자고 제안했는데 폴은 캐런을 위해 알겠다고 했다. 캐런은 아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아술이 라몬이라는 남학생과 로맨스가 있다고 귀띔을 해줬다. 폴은 아술과 친해질 수 없었지만 캐런이 주는 정보로 아술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캐런은 폴과 결혼 전에, 같은 위치에 있는 남자와 결혼을 했었는데 잘 나가는 캐런에게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혼을 한 뒤 폴과 결혼을 했는데 폴은 자격지심이 없고 자연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폴의 문제로 인해 둘은 임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캐런은 폴을 떠나지 않았고 그들은 그렇게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캐런은 직장 생활에서 번아웃을 느끼게 되어 다 큰 아이를 1년동안 맡아보고 싶다고 했다. 
 아술은 캐런과 가까워져 비밀을 공유하곤 했는데 캐런은 뭔가 이런 관계에서 활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아술의 책상 서랍에서 대마초가 있는 것을 보고 캐런은 아술과 멀어질까 꾸중하지도 못한다. 어떤 이유때문인지 라몬과 아술은 사이가 안 좋아졌는데, 아술을 위해 파티를 열고 라몬을 초대하지 않았다. 폴은 자신의 집에 십대 청소년을 위한 파티는 처음이라 쿨한 척 하려고 같이 취했다. 
 하지만 그 파티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아술은 피범벅이 된 채로 응급실에 가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마치 어떤 프로젝트마냥 했던 캐런과 폴. 쿨하고 멋진 부모가 되려고 하는 것과 현실적인 환경은 대조를 이루어서 생각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 캐런은 동료 중에 와이프를 잃었던 중년의 남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을 늘 챙기려고 했다. 하지만 부부의 여행까지 그 남자를 데리고 가려 하자 폴은 정색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한 적이 있었다. 아술이 오면서 왠지 모르게, 폴은 캐런을 아술에게 뺏기는 기분이 들어버렸다. 

 이 모든 것은 캐런의 번아웃, 아이없는 부부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라고 느끼는 착각 등에서 벌어진 것 같다. 우리는 늘 내 삶에서 모자라는 것을 되돌아보곤 한다. 내 삶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캐런과 폴은 10년동안의 결혼생활에서 오는 안정감이 지루함으로 바꼈고, 그 안에서 무언가 리프레시되었으면 했을지도 모른다. 

 


04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나는 잠시 후 그가 내 얘기를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마침내 이야기를 끝마치자 그는 함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슬픈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이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헤더."

"무엇때문에요?"

"이런 만남." 그가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이런 만남을 되돌아보며 나를 미워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나는 그를 보았다.

"내가 두려운 게 뭔지 알아요. 로버트?" 나는 그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요."

 

 어느날 헤더는 대학에서 물리학 시험을 본 후, 해당 과목 교수인 로버트는 티타임을 갖자고 집으로 초대했다. 아무도 그 시험에 풀이과정을 적을 수 없었는데, 오직 헤더만이 그 풀이과정을 작성했다. 그 풀이과정이 틀렸을지언정, 로버트 교수는 그녀를 초대해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로버트와 헤더는 30살이 넘게 차이가 났지만 그들은 뭔가 서로에게 끌리고 있었다. 헤더는 의대 예과 과정을 마치고 있는 콜린과 사귀게 되었다. 헤더는 콜린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로버트 교수는 헤더에게 연락해서 종종 같이 티타임을 갖자고 말했다. 헤더는 콜린을 사랑했고 진지한 관계까지 생각했지만, 로버트 교수를 만나는 일이 너무 설렜다. 처음 취지는 물리학에 관해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점점 서로의 인생관, 사람과의 관계, 철학 등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헤더는 로버트 교수와 말할 때면 무엇도 평가받지 않고 모든 것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신의 다이어리같다고 느꼈었고 그 시간을 기다려왔다. 
 그렇게 로버트 교수의 집에서 티타임을 갖다가 그는 갑자기 밖에 나가서 술을 한 잔 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술집으로 가서 헤더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로버트의 손을 잡으며 늘 그렇듯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콜린은 그 모습을 보게 되었고, 콜린은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콜린과 헤더는 결혼하게 되고, 헤더는 가슴 속에 그를 묻어두며 살아간다. 그녀는 순종적인 의사 부인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젊은 날에 사랑했던 물리학은 로버트와 함께 묻어버렸다. 어느 날 콜린의 지인을 통해, 로버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헤더는 펑펑 울었고, 아주 가끔씩만 로버트를 생각하기로 한다. 

 

 위의 단편이 이 책을 대표하는 제목이 되었다는 것이 십분 이해가 갔다. 이 책은 계속 여운이 남게 됐던 것 같다. 사랑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계속 갈망하고 상처받고 행복하기도 하다. 헤더는 나이차가 2배 이상이나 나는 로버트를 사랑했고, 콜린 또한 사랑했다. 어쩌면 한 마음에 두 사람을 품는 것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괘씸하다고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이 존재한다.

 어쩌면 헤더가 느낀 콜린에 대한 감정은 평생 함께하기에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자연스러운 의지와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자기희생은 당연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버트 교수에게 느낀 사랑은 헤더의 욕망을 담은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헤더는 계속 물리학에 관심이 있어왔고, 그것에 관해 깊이 공부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당시 여자는 자신의 커리어를 성장하기 어려웠고, 결혼과 커리어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로버트는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였는데, 헤더는 사랑할 수 없는 위치의 그를, 마치 물리학처럼 갈망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헤더에게 로버트라는 존재는 자신의 꿈이었다고 해석했다. 물리학을 사랑했지만 여성은 사회적으로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연구에 집중한다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꿈이었다. 헤더는 콜린과의 결혼 생활 내내 콜린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한편으로는 로버트를 그리워했다. 그렇게 로버트를 그리워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꿈과 젊은 시절을 그리워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나의 중요한 또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 생각에,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으 ㄴ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시킬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사랑, 꿈, 못 다 끝낸 관계,.. 우리는 마음 속에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관념적인 것일 수도,... 

 


05 강가의 개

어느 날 밤 더그 형이 친구들 무리와 함께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서는, 이웃집 앞에 주차된 폰티악 조수석 창문을 향해 석회석 벽돌을 내던졌던, 우리가 펜실베이니아주에 살게 되면서 맞이한 첫 여름에 대해 말해준다. 나는 내가 포치에 나와 앉아 있었고 그 모든 일을 믿을 수 없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다음날 이웃집에 사는 칼러씨가 건너와 더그 형이 자기 자동차 창문을 박살냈다며, 아내가 목격까지 했다고 말했다. 더그 형은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그러자 큰 언쟁이 일었다. 그들은, 더그 형과 칼러 씨는 이십여 분가량 언성을 높였다. 결국 우리 어머니가 사과를 한 후 칼러 씨에 수표를 써주었다.
나는 여자친구에게, 나중에, 칼러 씨가 가고 난 후에, 내가 밖으로 나가, 그의 폰티악의 비닐 카시트에서 유리 파편을 털어내고, 거리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쓸어담기 시작했노라고 말한다. 석회석 벽돌은 여전히 차 바닥에 있었다고. 
 잠시 후, 칼러 씨가 집에서 나오더니 내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 
그것은 이후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말이다.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나'에겐 5살 위의 더그라는 형이 있다. 형은 사고뭉치였고, 23살이나 먹었어도 고등학생인 '나'의 학교 선배 미셸과 사귀고 있었고 그녀에게 청혼을 할 예정이었다. '비정상'이라고 낙인 찍힌 그의 형에 관한 소문은 무성했고, '나'는 그냥 그 소문을 못 들은 체 했다. 그래도 열일곱살 그 나이 때, '나'는 더그 형과 함께 강가의 버려진 개들을 찾아갔으며 나름 형제간의 우애가 좋았다. 
 벤슨 집에서 독립기념일의 파티가 열린 어느 날이었다. 더그가 미셸에게 3번이나 청혼했지만 모두 차였던 그 날이었다. 그 날, 더그의 친한 친구 트레이와 함께 캐리 휴버에게 멀미약과 비슷한 약을 먹여, 그녀를 벤슨네 집 뒤뜰에서 강간을 했던 것이었다. 캐리 휴버가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더그와 트레이는 어떠한 혐의도 받지 않았었고, 캐리 휴버는 더 이상 어느 파티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더그와 가까이 지낼 수 없었고, 서로 서먹해졌다. '나'가 스물 여섯살이 된 그 날 고향에 내려갔을 때, 캐리는 머리가 짧아졌고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 '강가의 개'는 사람들에게 버려진 개들을 말한다. 더그 형은 이 책에서 사람들에게 버려진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사고를 쳐서 부모조차 그를 대우해주지 않았고, 그는 사회에 적응하기를 어려워했다. 하지만 그 버려진 개와 다름없던 더그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동생이자 이 작품의 화자였다. 

 더그와 트레이가 캐리 휴버를 강간했던 사건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더그와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저 지난 밤의 실수라고 둘러대는 그들의 가벼운 해프닝이 캐리 휴버에겐 인생을 뒤엎는 큰 사건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 무게를 '나'는 알았던 것이다. 가장 마지막에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라는 칼러 씨의 한마디는 그의 마음에 계속 남았었다. 내 일이 아니라고 그저 방관하는 자세는 강가에 또 다른 버려진 개를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그의 행동을 방관하다 캐리 휴버라는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닫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과연 세상에 '나의 일'이 아닌 일이 얼마나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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