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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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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기간: 2022.12.01 ~ 2022.12.14


 

개인적인 평가

  • 몰입도는요?: ★
  • 다시 읽을 의향 있나요? ★★
  • 주변사람에게 추천할만한가? ★★
  • 작가의 다른 작품 찾아 읽을 의사? ★★★★★

 여전히 에리히 프롬은 좋은 말만 해주지만, 옮긴이가 문제인건지 내 집중력이 문제인 것인지... 참 어렵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에리히 프롬은 항상 결론이 열린 결말과 같다. 있는 힘껏 결론을 마무리 지어주고 싶어하지만 결론에 임팩트가 강하지 않다. 인간은 늘 복잡한 동물이기에 모두에게 똑같은 삶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0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19세기 악덕 악덕의 잔재가 현재를 만들었다.
1 권위주의, 맹목적 복종의 요구 공개적 권위: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기회 제고 
익명적 권위: 시장(market), 여론, 건강한 인간 이성
2 야만적인 착취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여 기계처럼 굴러가게 두고 있다.
3 성과 인종 차별 오늘날의 평등이란 동일한 것.
동등한 권리를 원한다면 타인들과 동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난무한다. 즉, 많은 사람들의 강요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진다.
4 탐욕과 축재 우리는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수동적 소비자로서, 마케팅의 노예
5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자신과 혼자 있을 수 없는 무능력, 소속감을 중시하는 모습이 19세기의 악덕과 반대의 모습을 띤다.

 

 

02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과거의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이용하여 그들의 사상에 주입시켰다. 다른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은 이성을 갖춘 존재, 도구를 만드는 생명체, 언어의 사용을 하는 존재라고 정의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정의는 인간의 속성들일 뿐이지, 인간 본성 전체는 아니다. 

 인간을 완벽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위의 '본질적 속성'들은 '인간의 본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이미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원칙일 뿐 아니라 능력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이성과 사랑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만큼 자신의 본질에 도달한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과 사랑의 능력이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자신을 자각하고 자신과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진술하는 능력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바로 인간 본성의 기본 요인이다.  

 

 

03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유를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 심리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비합리적 열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실제 두 개념은 상호보완적이다. 자유롭고 싶은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둘은 - 칸트의 말대로 - 자기 목적이어야 한다. 수단은 도구이고,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스스로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대상, 사물이 된다. 

 자유란 의지에 따른 결정이며, 의식적 인식을 의미한다. <햄릿>에서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라는 말은 진짜 자신을 아는 정신적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이론은 인간은 타인과의 관게에서 그 자신이 되려는 욕망을 품는 존재이다. 자유를 억압하려는 존재이든, 자유를 찾으려는 존재든 자신을 알지 못 하면 무엇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은 인식이지만, 또 인식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에게 투명하다면 타인의 불투명성은 인간의 가능성 안에서 투명해질 것이다. 

 

0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자발성의 전제 조건은 인격을 전체로 받아들이고 '이성'과 '본성'으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자아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억압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이 명료해질 때, 삶의 다양한 영역을 근본적으로 통합시킬 때에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발성의 중요한 요인은 사랑 그리고 노동이다. 매순간 자발적 활동을 하면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안전,(남들이 하는 것들을 필수라고 착각하지 않을 수 있는)을 가질 수 있다. 

 인간 내면의 강인함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아는지의 여부에 크게 좌우된다. 자신에 대한 환상은 지팡이와 같다.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도움은 되지만 그를 더 약하게 만들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온전하게 완성할수록, 다시 말해 '자신을 잘 꿰뚫어볼수록' 더 강해진다. 

 오늘날의 인간은 삶에 굶주려 있다. 하지만 순응주의자이기에 삶을 자발적으로 경험할 수 없고, 자극과 스릴의 형태를 띤 대용품을 움켜잡는다. 술과 스포츠가 주는 스릴이나 스크린의 허구적 인물을 통해 경험하는 스릴 말이다. 

 

05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현대인이 느끼는 고립과 무기력의 감정은 인간관계를 통해 더 강화된다. 인간은 서로를 조종하고 서로를 목적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며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모든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에서 시장 법칙이 통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개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중에도 자립적인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자립적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더 나아가 위험한 생각이다. 자립적이라는 생각이 이런 상황을 만든 조건을 제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최면실험을 통해 자신이 하는 생각이 과연 스스로 낸 결과인지 혹은 다른 사람들의 영향으로부터 뿌리깊게 박힌 생각인지 파악해보았다. 최면으로 머리에 심어둔 아이디어는 당사자의 생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도 우리 스스로 생각해낸 것인지 혹은 사회와 환경으로부터 스며든 생각인건지에 대해 고찰이 필요하다. 

 사고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 자신에게서 나온 진짜 감정이며, 자신의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사실 자신의 것이 아닌 가짜 감정을 구분해야 한다. 

 자아감은 스스로 나의 경험, 나의 사고, 나의 감정, 나의 결정, 나의 판단, 나의 행위의 주체로 느끼는 데에서 탄생한다. 그러자면 나의 경험이 실제로나 자신의 체험이지 소외된 체험이 아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사물은 자아가 없다. 사물이 되어버린 인간은 자아를 소유할 수 없다. 

 현대인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외부의 족쇄를 벗어던졌다. 자신이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만 알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자유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익명의 권위의 의지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자아를 받아들인다. 또 그럴수록 더 무력감을 느끼고 순응을 강요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모든 낙관주의와 피상적인 진취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06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현대인은 인간에게 봉사하고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 인간의 손으로 탄생시킨 작품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세계가 되고, 현대인은 그 세계에 비굴하고 무기력하게 복종한다. 

 그들은 사랑받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에 모든 관심이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난 기존의 특성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자신이 타인의 마음을 얻을 만큼 똑똑한지, 예쁜지, 착한지 하는 생각에 항상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질문은 늘 이렇다. "난 똑똑할까? 난 예쁠까? 난 안 똑똑할까? 난 안 예쁠까?" 그 대답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보통 사랑과 호의를 얻는 데 필요한 특성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결론과 깊은 열등감을 결과로 얻게 된다. 

 무력감의 종류

  • 공격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무력감
  • 모든 종류의 모욕과 비하에 나타나는 무력감
  • 익숙하지 않은 모든 상황에서 완전히 속수무책의 기분이 되는 무력감
  • 비실용적이거나 미숙하다고 칭하는 행동 속에서의 무력감

무력감을 합리화하기 위한 믿음의 형태

  • 기적에 대한 믿음
    • 외부 상황의 어떤 변화가 급변을 몰고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 시간에 대한 믿음
    • '시간이 가면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라는 기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느끼는 갈등에 대해서도 직접 결단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자신 및 사회의 운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결정적인 힘과 상황을 올바르게 통찰하는 것이다. 

 

07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 무의식적으로는 그 차이를 너무나 잘 인식하면서도 말이다. 왜곡하여 바라보는 것은 불교 교리에서 말하는 탐(탐욕), 진(성냄), 치(어리석음)에 해당하는 3독 때문이다. 탐욕을 갖고 상대에게 무언가를 원할 때 상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탐욕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분노가 강요하는 대로, 우리의 어리석음이 상상하는 대로 상대를 왜곡한다. 

 있는 그대로  나의 인격 드개로 응답하기 위한 조건 3가지 

  1. 감탄의 능력
  2. 집중력
  3. 회피하지 않고 양극성에서 나오는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능력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 | 매일 오늘 새롭게 태어나라.

 

 


기억에 남는 구절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에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물론 분명 시간은 절약된다. 하지만 시간을 절약해 놓고는 막상 그 절약한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한다. 기껏해야 시간을 죽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일주일에 3일만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시간이 너무 많아서 뭘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영혼의 붕괴를 수용할 만한 병원은 아직 충분치 않다. 

 삶이 윤택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돈을 버는 것인데, 현대인들은 돈이 목적이 되어 가고 있다. 그렇게 기계처럼 살아버리니 시간이 남게 됐고, 남는 시간에 무슨 일을 해야할 지 모르는 단계가 된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이 수단일 뿐이라면, 남는 시간에 자신을 위한 일을 했을 것이다. 기계처럼 굴러가는 우리의 삶이 무기력을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이 모두는 진리의 관념이 모호하다는 증거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관점에서 볼 떄 그가 원하는 게 마땅한 것만 원한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이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까다로운 문제 중 하나이다. 완제품으로 제공된 목표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악착같이 회피하려는 바로 그 과제인 것이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 외에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어릴 적에 내가 꿈꿨던 삶이 있기는 했다. 나의 분신같은 친구(혹은 나의 자식, 지금은 강아지도 허용)와 함께 차타고 단 하나의 짐을 챙겨 세상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세상에 나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현실을 보기 때문에 집도 사야할 것 같고, 언젠가 결혼도 해야할 것 같지만... 단순하게 내가 원하는 삶은 세상의 모든 곳을 샅샅이 구경다니는 것이었다. 

 사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넌 누구니?"라는 질문에 타자기는 "나는 타자기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자동차라면 "난 포드야." 혹은 "난 뷰익이야.""나는 캐딜락이야."하고 대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넌 누구니?"라고 물으면 "난 회사원이야.""난 의사야." 혹은 "난 유부남이야.""난 두 아이의 아빠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해당 사물의 대답이 갖게 될 의미와 상당히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나는 어떻게 나를 표현할 것인가...? 나는 나를 표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나이가 어느정도 들고 보니 나를 표현하고 싶은 키워드가 문득 생각나기는 하는 것 같다. 물론 나를 표현하기 위한 정답은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내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Explorer"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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