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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쇼코의 미소, 한지와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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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와 영주

그애들과 헤어진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고 못된 짓을 하는 것 같았지. 이게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까지 나왔어. 그러자 다른 선생님이 말했지. 그건 우리 생각일 뿐이라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걔네의 행복을 막아서는 안된다는 거야. 사랑과 애착을 구별해야 한다면서, 나를 위해서 야생동물들을 곁에 두려는 생각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고 했어. 헤어지던 날 걔들을 케이지에 태우고 운전을 해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 풀어놓았어. 돌아서려는데, 내 쪽을 자꾸만 보더라. 보지 말고 앞으로 가라고 말했어. 그런데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거야. 그애들, 뒤를 돌아보면서도 앞으로 가더라. 천천히 우리를 등지고 그렇게 초원 속으로 가더라.

 프랑스 어딘가 수도원에서 봉사를 하고 있던 영주는 나이로비에서 온 봉사자 한지를 만났다. 영주는 한지가 좋았고, 한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수다를 떠는 일이 좋았다. 한지는 나이로비에서 수의사로 일했었는데, 전공 시절 그가 고아가 된 야생 코뿔소 두 마리를 아홉 달간 키워서 야생에 되돌려 보낸느 프로젝트에 참가했었다. 야생 코뿔소의 이름은 하위와 글로리아로 지었는데, 그들과 아홉 달동안 정이 많이 들어 그들을 되돌려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위와 글로리아를 사랑한다면 그들의 세상으로 보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생 보살펴야 하는 여동생 레아가 있었다. 그는 난생처음 세렝게티 공원에 갔을 때도, 밖에서 맛있는 것을 먹을 떄도, 여자애랑 데이트할 때도, 클럽에서 춤을 출 때도, 노래를 부를 떄도 레아를 생각했다. 그의 일부는 항상 레아에게 있었다. 

 한지는 수도원을 떠나기 2주 전부터 영주를 '단절'하기 시작했다. 영주는 너무 힘들었지만, 이별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영주는 한지와 함께 있으면서, 그와 미래를 상상했고 그 상상 안에 레아가 있었다. 한지는 레아가 있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영주를 잡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주는 기억하려고 했고, 한지는 기억을 잃을거라 확신했다. 기억하려는 영주는 지금이 아니면 만나지 못할 인연이라 여긴 것일까? 기억을 잃을거라 확신했던 한지는 영주를 언젠가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었을까? 한지가 매몰차게 단절했던 것은 아마 남겨질 영주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녀의 삶을 응원하기에. 처음 읽었을 때, 한지의 마음이 납득이 가지 않았는데 나는 너무 영주였다. 한지는 영주에게 뜨겁기엔 자신이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 

 

황보름 작가의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에 언급된 <쇼코의 미소>를 보고 한 번 쯤 읽고 싶었다. 휴남동에서는 <쇼코의 미소>의 '미카엘라'가 언급됐었는데, 나는 유난히 '한지와 영주'가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다. 무던하게 시작해서 무던하게 끝나는 최은영 작가의 글엔 힘이 있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울컥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든 추억만으로도 웃음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
- '씬짜오, 씬짜오' 중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지적하는 엄마의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을 섬세함으로,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줌마의 애정이 담긴 시선 속에서 엄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였었다. 
- '씬짜오, 씬짜오' 중

 

네가 나에게는 첫 선생님이었다, 처음으로 나를 따뜻하게 칭찬해준 사람이었다고.
- '비밀' 중

 

하지만 여자는 남편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현장에 가 있는 것이 그의 업이었고, 그 부분에 있어서 그는 누구보다도 근면한 사람이었다. 그가 하는 일들이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무능하고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단죄할 수는 없었다. 
- '미카엘라' 중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고도 울컥했었는데, 그 때 한참 <파친코>를 읽던 중이라 그런지, 4대에 걸친 여자들의 삶이 참 먹먹했다. 최은영 작가의 책은 덤덤하게 역사적 아픔이나 차별 등이 들어가 있다. 다음 책 <애쓰지 않아도>엔 어떤 배경이 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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