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양귀자 |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2025. 6. 7. 17:09그냥,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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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보문고

 

 

줄거리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어느 날 진진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제대로 관찰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진진의 어머니는 쌍둥이 자매다. 둘이 똑같은 뱃속에서 태어났고, 둘이 똑같은 날에 시집을 갔다. 하지만 둘의 남편은 180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진진의 아빠는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집에 오는 날이면 항상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돈을 갈취했다. 하지만 진진의 이모부는 심심한 사람으로 표현되지만, 항상 자신의 가족들에게 최고를 선사해주려고 노력하는 가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남편을 둔 어머니와 이모의 인생 또한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그런 진진에게 두 남자가 생겼다. 한 남자는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사진작가 김장우, 나머지 한 남자는 계획과 일정에 의존하지만 중산층 화이트칼라 나영규. 마치 김장우를 선택하면 어머니의 인생을 따라갈 것 같았고, 나영규를 선택하면 이모의 인생을 따라갈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철저하게 비교해서 선택을 하려고 했다. 결혼으로 인해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은 이모와 엄마를 통해 알 수 있었으니까.

 

 과연 진진은 누구와 결혼을 하게 될까?

 

 

<모순> 후기 (스포주의)

 

 이 책의 문체가 너무 세련되어 얼마나 오래전에 나온 책인지 실감나지 않았다. 진진의 동생 진모가 <모래시계> 최민수를 따라한다기에, 그제서야 초판날짜를 확인해봤다. 초판 날짜는 1998년 6월 27일이었다. 25년이 훌쩍 넘은 이 작품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아 고전문학이 맞구나 싶었다. 나는 톨스토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분명 작품 배경은 내가 사는 시대와 동떨어져 있는데, 저 시대의 인간 군상들이 현대와 딱히 다르지 않다는 것에 항상 놀라웠었다. 역시... 명작들은 100년이 지나도 시대의 어색함이 없는 것이다.

 

photo by @jamjamzo

 

 사실 <모순>이라는 책은 많은 독자들 사이에서 많이 언급됐던 책인데, 내가 너무 늦게 읽은 감도 있다. 나름 트렌드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항상 인기있는 책을 많이 읽어두려고 하는 편인데 말이다. 나는 철저하게 eBook파이기 때문에 <모순>이 eBook으로 나오기만은 존버했다! 하지만 1-2년이 지나도 영원히 나오지 않는 <모순>ㅠㅠ 결국 내가 졌다. 종이책을 사고야 말았다ㅋㅋㅋ 오디오북은 있었지만 나는 웬만하면 청해보다 독해파다...; 거참 되게 까다롭네... 나...;; 하여튼 오랜만에 종이책을 읽는 것도 꽤 좋았다. 사락사락 종이 넘기는 맛이 있다.

 

 이 작품이 단순 어떤 삼각관계 로맨스를 그렸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첫째는 가부장제에 대한 모순도 느껴졌다. 남자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엔 많은 것들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돈을 버는 것에서 오는 자기효용감, 성취감, 자아실현 또한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진진의 엄마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불행했다지만 정말 스스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가 돈을 버는건 당연하고, 여자가 돈을 벌면 팔자 사나운 것. 1998년도 작품이라지만, 2025년에도 아직 그런 생각들이 잔존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진진의 아버지가 놈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진만큼 그녀의 아버지를 깊게 이해하고 싶지 않다. 아마도 내가 철저한 타인이라서?

 

둘째로 타인을 바라보는 자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타인의 삶을 너무 얕보아서도 안 되고, 너무 다 안다고 생각해도 안 되는 것이다.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서사가 있었다. 사촌 주리가 진진의 아버지를 킹콩이라 부르면서 마음의 상처를 줬지만, 진진은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했다. 진진은 그런 주리마저도 이해했다. 마음이 서글플 때도 있었지만 이해하고 포용했다. 그래서 이모가 진진을 많이 의지했을지도 모른다. 진진은 남들 눈에 아무 걱정없이 해맑은 이모마저도 이해했다. 

 

둘째는 인생에 대한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꼭 신랑감을 선택하는 그 주제를 보고 다룰 가벼운 작품이 아니었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안진진은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해야할지 1년 동안 유심히 관찰하면서 탐구해왔다. 결국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었고, 자신이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되지만, 그것이 인생인 것!"

 

진진의 시점에서 
엄마와 이모의 인생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임에 틀림없으니까.

 

 놈팽이 남편을 둔 어머니는 매사에 고군분투였다. 그 일을 해결하기 바빴다.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책의 도움을 받곤 했다. 쌍둥이 동생인 이모도 또한 책을 읽었다. 엄마는 정보가 가득한 비문학을 읽었지만, 해결해야하는 걱정이 없는 이모는 문학소설을 읽었다. 진진은 이모가 좋았다. 늘 자식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어머니를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팠고, 죄책감이 함께 들었다. 최대한 그 고생에 자신을 넣고 싶지 않아 진진은 어려서부터 일찍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남동생 진모라도 가만있었음 좋았을 것을, 진모도 사고를 그렇게 치고 다닌다. 엄마는 또 그걸 해결하러 다닌다.

 

 이모는 낭만있고 해맑은 사람이었다. 이모는 아무 걱정없는 평탄한 인생이 너무 죽어있는 것만 같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진진과 진모의 유년시절에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로부터 대피를 시키기 위해 운전했던 과거가 너무 신이 났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순간에 살아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이모는 진진의 엄마 역할을 대신 하는 것도 좋았다. 진진이 어릴 적에 바쁜 엄마(라고 부르지만 부끄러운 엄마) 대신 똑같이 생긴 이모에게 일일 선생님을 부탁했던 일을 떠올린다. 진진은 이모가 우리 엄마였음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모는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행동하는 것들에 살아있다고 느꼈다.

 

 이모는 엄마가 부러웠고, 엄마는 이모가 부러웠다. 엄마는 가족들이 사고를 자꾸 치는 바람에 의도치 않은 고난만이 가득했던 인생이었지만, 자신이 주체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모는 이모부의 철저한 방어 덕분에 평온한 일상이 가득했지만 자신의 주체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인형같은 삶이라고 느꼈다. 진진은 이모와 엄마를 보며, 나영규와 김장우와의 결혼을 고민하게 된다.

 

진진의 주변 남자들
아빠, 이모부, 김장우, 나영규

 

 진진은 생각보다 아빠가 밉지 않았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순간에 아빠에게 원망한 적은 있었지만, 아빠를 이해하려고 했다. 진진은 "이해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있는 캐릭터였다. 아무도 모든 것을 다 가진 이모와 이모부를 이해할 필요는 없었지만, 진진은 그들의 입장도 이해해줬다. 누구보다도 핍박을 받는 삶을 가진 엄마는 다 동정하고 연민을 느끼며 이해해주려 한다. 하지만 아빠는 그냥 놈팽이 그 자체이기에 아무도 그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도 진진과 진모는 아빠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빠는 가부장제에 걸맞지 않은 인물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책임의 테두리 외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 때 갑갑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아마 직장 또한 여러번 바꿨던 이유도 자신의 적성을 찾지는 못했는데 책임져야 할 자식들을 돌봐야 한다는 압박이 너무 컸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집안의 돈을 갈취하고, 아내에게 폭력을 쓴 것 자체가 정당화되지 않지만, 그래도 진진은 아빠를 이해했고, 아빠가 돌아오길 바랐다. 

 

 그렇게 계획없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사람을 만났다. 김장우였다. 김장우는 돈도 없었을 뿐더러, 가족도 형밖에 없었다. 그는 딱히 인생에 뚜렷한 계획은 없었고, 그저 자신을 뒷바라지 해준 형에게 은혜를 갚고 싶은 착한 동생이었다. 적어도 아빠와 다른 점이 있긴 했다. 자기 가족을 보살피려는 책임감 정도는 있었다. 진진은 처음부터 김장우가 더 좋았다. 김장우가 더 끌렸고, 더 이해가 갔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김장우 앞에선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김장우는 진진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가족인 형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걸 진진이 이해해주길 바랐다. 이렇게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 앞에서 콩가루같은 집안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

 

 이모부는 올곧은 사람이다. 가족밖에 모르는 가족바라기였고, 자식과 아내를 챙기면서, 탄탄한 회사를 건사해 가는 것이 목표인 사람이었다. 항상 가족들에게 좋은 것만 주고, 좋은 것만 입히는 것에 행복감을 느꼈고, 자식은 정말 굳은 살 하나 없는 채로 탄탄대로 인생을 주었다. 자꾸 돈을 꿔가는 쌍둥이 언니가 있어도 괜찮았다. 그냥 아내의 가족 사정 마저도 받아들였던 사람이었다. 나영규가 이모부랑 비슷한 맥락이었다. 진진은 나영규에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었다. 진진이 털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나영규를 더 믿었다기 보다 그에게 그 만큼의 기대와 감정이 없었다는 것도 있다. 이 사람이 당장 나의 이야기를 듣고 진저리를 치며 떠난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심지어 안진진과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이 남성에게 전혀 낭만을 느끼지 못하고, 갑갑함까지 느꼈다. 하지만 나영규는 그냥 안진진 그 자체가 좋았던 것이다. 

 

 하여튼 김장우에게 더 끌리는 안진진을 보면서 지팔지꼰이라는 생각을 은근하게 했던 것 같다. 

 

결말(스포주의)
그래서 남편은 누구?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참 할 말이 없구나. 그것이 나의 불행인가봐.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내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말야.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그래서 그만 끝낼까 해. 

 

 그렇게 낭만있는 이모는 평탄한 삶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진진에게 부탁한다. 이모는 진진이 참 좋았다. 진진도 이모가 좋았다. 이모도 결핍이 있었고, 진진도 결핍이 있었다. 쌍둥이 언니인 엄마는 동생의 결핍을 이해해주지 않았지만, 진진은 이모를 이해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했다. 이모는 자식이 둘이나 있지만, 자기의 인생을 찾아 나서고 부모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카 진진이 이모를 더 챙기면 챙겼다. 이모는 그게 참 미안했을 것이다. 진진을 자기 자식만큼 사랑해줄 수 없어서... 그리고 끝까지 자기 자식한테도 하지 못한 부탁을 조카 진진에게 사후처리를 맡겨달라며 부탁한 것마저도. 한편으론 이모도 끝까지 자기 자식만 생각한 것이다. 자신만큼 평탄한 삶을 살지말라고 이런 비극을 자식들에게 선사해줬다.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이모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나는 김장우의 손을 잡아야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모의 죽임이 나로 하여금 김장우의 손을 놓아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이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오히려 이모의 죽음이 신랑감을 고르는 문제에 열쇠가 되어줬다. 이모는 죽기 전에 열쇠를 소포로 보냈는데, 한편으론 진짜 해결책이 되었던 것이다. 이모는 결핍이 없는게 결핍이었다면, 진진의 결핍은 확실했다. 그녀는 안온한 가정이 결핍이었고, 언제 어떻게 튈지 모르는 인생이 아닌 정해져 있는 탄탄대로의 운명이 결핍이었다. 진진은 정말로 그게 필요했다. 오히려 이모의 죽음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진진이 이모처럼 살게 될지, 엄마처럼 살게 될지는 두고 봐야할 일이다. 나영규랑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이 탄탄대로일거란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수미상관미쳤다. 가장 첫 장과 마지막 장의 멘트에서 나는 정말 이게 예술인가 싶었다. 나영규를 선택한 진진, 인생이란 어떻게 튀어나갈지 모르는 거지만 나는 진진은 엄마의 DNA를 가졌기때문에 어떻게든 잘 해쳐나갈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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