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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천재의 지도, 위대한 정신을 길러낸 도시들에게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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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천재는 단순하다 - 아테네

모든 도약의 첫 단계는 자신의 앎이 불완전함을 깨닫는 것이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16-Atene,_Partenone-Scorcio.jpg

 알아가다보니, 천재의 장소가 낙원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야말로 무엇보다 큰 오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낙원은 천재와 상극이다. 낙원에서는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는 데 반해 창조적 천재는 새롭고 기발한 방식으로 요구를 충족하는 데 그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니체는 "아테네인들이 성숙한 것은 사방에서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는 그의 유명한 금언과 같은 맥락이다. 창의성은 환경에 대한 대처다. 그리스 회화는 복합광에 대처한 결과였고(그리스의 화가 아폴로도로스는 깊이의 착시를 만들어내는 기법을 처음으로 개발했다) 그리스 건축은 복잡한 지형에 대처한 결과였으며, 그리스 철학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대처한 결과였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즐길 줄 아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늘 전쟁을 하거나 전쟁에 대비했던 그리스, 언덕과 바위투성이 땅으로 비옥하지 않는 "앙상한 뼈(플라톤 왈)"라고 불리었던 아테네. 어떻게 이런 도시에 천재들이 난무했을까? '시민의 의무'라기 보다 '시민의 기쁨'을 가진 그들의 삶에는 자유가 담겨 있다. 에릭은 현존하는 그리스의 철학자를 만나려고 했으나 계속 실패를 거듭했다. 천재 브래디와 카페인과 알코올의 균형을 맞추며 만남을 갖다가, 브래디는 "관건은 맞물린 피드백 고리입니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스계 미국인인 요리사 조애나를 만나러 식당을 방문해서 그리스의 음식이 끔찍한 이유는 다른 곳에 에너지를 쏟아붓는거라는 둥 깊은 고민에 빠진다. 

 따라서 사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언어를 사랑하는 로버트가 '당대의 셰익스피어' 투키디데스를 가장 만나고 싶은 역사 속 인물로 고른 것은 놀랍지 않다. 로버트가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그는 천재였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언어를 발명했죠. 그는 언어학자이자 심리학자였으며, 사건을 묘사할 뿐 아니라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도 들여다보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지, 행동에 어떤 패턴이 있는지, 말과 행동의 관계가 어떤지 탐구한 최초의 인물이죠. 그는 사실상 이 분야 전체를 발명했는 투키디데스를 2000년째 연구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책과 논문을 읽으며 여전히 무릎을 칩니다. '오, 그렇지. 바로 이거야. 이 모든 층위 아래에 천재의 층위가 고스란히 있다고' 하고 말이죠."

 호텔로 돌아온 에릭은 투키디데스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 천재들은 아마 불우한 환경 속에서 피어나지 않았을까 라는 영감까지 받곤 한다. 결국 에릭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 

  "천재 - 제2의 천재에 대한 보호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어리둥절했다. 제2의 천재라니? 이게 무슨 뜻이지? 제2의 천재가 있다면 제1의 천재는 누구(또는 무엇)일까? 정답은 아테네 자신이다. 아테네인들은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앞서 보았듯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테네의 영광을 위해서 경쟁했다. 이 의무를 망각하는 자는 누구든 추방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도편추방에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또다른 건설적 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추방된 아테네인 중 몇몇은 유배 기간에 최의 성과를 거뒀다. 이를테면 투키디데스는 군사 작전에 실패하여 추방된 뒤 최고 걸작을 썼다. 어떤 사람들에게 배제는 위대함을 향한 박차가 되는 걸까?

 에릭 와이너가 내린 결론은, 자연과 걷기를 좋아하고, 미식가는 아니었지만 포도주를 즐기며, 개인 위생은 외면해도 시민으로서의 책임은 진지하게 받아들인, 경쟁으로 번성한 아테네인들 사이에서 천재가 나왔다고 믿고 있다. 찬란한 천재의 황금기를 지녔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지금은 관광지로 몰락한 아테네지만 여전히 존경받아 마땅하다. 

 

 

2장, 천재는 새롭지 않다 - 항저우

중요한 건 몇 번 성공하느냐가 아니라, 몇 번이나 다시 시작하느냐다.

https://www.accesswire.com/610111/Hangzhou-has-released-Top-Ten-Scenes-of-Digital-Economy-Tourism-officially-for-the-first-time-in-China-Through-Combining-Tourism-and-the-Digital-Economy

 일전에 커피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하루에 예닐곱 잔씩 커피를 마시다가 어느 날 뜻한 바가 있어 그날로 커피를 끊었단다. 커피는 이제 그만. 오로지 차만. 그는 개종자답게 확신에 찬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커피를 마시면 생각이 빨라지지만 차를 마시면 생각이 깊어집니다." 항저우의 작고 완벽한 찻집에서 완벽한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앉은 지금, 그가 옳을 수도 있겠다 싶다. 중국의 천재성과 서양의 천재성이 어떻게 다른지가 이로써 설명될까. 우리 서양인은 카페인의 즉효성과 그로 인한 번득이는 통찰을 높이 사지만 동양에서는 자기네 카페인을 그보다 천천히 흡수함으로써 긴 안목을 기른다. 곧 알게 되겠지만, 창의성에 대한 동서양의 접근법 차이는 이것 말고도 많다.

 도대체 에릭은 어떤 천재를 찾아 다니는 것일까? 1장, 아테네부터 2장, 항저우까지 읽으면서 곰곰히 생각했다.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역사를 살펴 보면서 현재의 그 도시까지 살펴본다. 그가 살펴본 중국의 천재들이 생겼던 이유를 찾고자 하니 보이는 것은 중국사람들은 실용성을 중시했다. 유머 또한 합리적이어야 웃기다고 생각하는 중국인들. 예전 송왕조 시절, 다양한 능력을 가진 문인들이 있었다. 그 옛날 그들은 지금처럼 전공이 딱 정해져 있지 않고 과학자이자 시인이자, 수학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중국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교묘하게 합쳐져 사람들의 지적 수준을 저하시키고 있나보다. 에릭은 천재성이 이동한 자리를 따라 다시 떠난다. 

 

3장, 천재는 값비싸다 - 피렌체

돈이 없으니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https://wallpapercave.com/wallpapers-firenze

 1504년 1월 25일 이탈리아 피렌체의 어떤 방에서 일어난 놀라운 화합을 생각해보라. 르네상스 시대의, 아니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위대한 미술가 스무남은 명이 그 자리에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있었고, 성은 부오나로티지만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젊은 신성도 함께했다. 보티첼리와 로셀리, 필리피노 리피, 피에로 디 코시모도 다른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이들의 작품을 모으면 미술관을 가득 채울 수 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오늘날,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우피치미술관은 이 회합이 열린 장소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져 있다. 

 저 회합의 목적은 피렌치시의 의뢰로 미켈란젤로가 최근 완성한 대작 <다비스> 상을 전시할 장소를 선정하기 위함이다. 아테네 이후로 한 도시가 명석한 정신과 훌륭한 아이디어를 이토록 많이, 그리고 이토록 짧은 기간에 배출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리적으로도 폭발할 만한 장소가 아닌 피렌체에서 어떻게 르네상스 시대가 열려 수많은 천재들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미켈란젤로는 돈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죽은 뒤, 침대 밑에서 상자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피렌체를 살 만큼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나의 기쁨은 우울함에 있다"고 말했다. 당대 메디치가는 피렌체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한 은행이었는데, 그들은 위대한 예술 후원가였다. 그래서 메디치가에서 후원받는 예술가들은 자돈 걱정 없이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펼쳤다고 한다. 어느 날, 어린 석공이 반은 인간이고 반은 염소인 로마의 신 파우누스를 조각했는데, 그의 실력을 본 메디치가의 로렌초는 그를 후원했다. 그 어린 석공이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보테가'란 사전적 의미로는 공방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수천개에 달하는 보테가는 마치 공장과도 같았다. 미술가 작업실보다는 노동착취형 공장을 닮았고, 봉급 또한 적었다. 현재 우리 시대의 '인턴'과 비교하면 된다. 이 사업을 하면서 천재를 배출했던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발굴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를 보면, 그는 자신의 자질에 대해 자신감이 낮아 있었고, 우울함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를 발굴한 베로키오는 그를 르네상스인으로 키우기에 넘치는 사업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상징이 되었지만, 그의 멘토인 베로키오는 다빈치의 노트에 한 줄도 남지 않았다. 에릭 왈, 멘토는 생색나지 않는 일이다. 라고 한다.

  "르네상스는 똥도 많이 쌌습니다."라는, 그의 훨씬 불경한 단언이 무슨 뜻인지도 알겠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발끈했지만 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를 인간 창조성의 정점으로 여기지만, 이 시대는 형편없는 예술과 형편없는 아이디어의 주맥이기도 했다.
 오늘날 천재로 추앙받는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에디슨이 보유한 1093개의 특허 중 상당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발명품이다. 피카소의 작품 2만 점 중 상당수는 걸작과는 거리가 멀다. 문학 분야로 보자면 W.H.오든 말마따나 "일류 시인은 일생동안 형평없는 시를 이류 시인보다 훨씬 많이 쓴다."
 이유는 간단하다. 표적을 겨냥하여 화살을 많이 날릴수록 명중할 가능성이 커지지만 빗맞은 화살도 많아진다. 하지만 미술관과 도서관에는 빗맞은 화살이 아니라 명중한 화살만 보존된다.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이 때문에 천재가 처음부터 옳고 실수하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겨난다. 실은 천재 안니 사람들보다 실수를 더 많이 저지르는데도 말이다.

 수개념에 강해 부를 창출할 수 있었던 르네상스, 돈이 많은 자들은 멘토가 되어 아티스트를 뽑아냈다. 도시가 전염병에 시달리고 외국 침략자들에게 위협받아 경제적으로 쪼들렸을 때, 위기를 기회삼아 그 시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아티스트를 뽑았다. 하지만 피렌체는 공교육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천재를 발굴해낼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바로 전문화다. 

 오늘날의 피렌체의 미술가들을 인터뷰했다. 과거 피렌체의 천재들은 현재 미술가들에게 짐처럼 얹혀 있다고 한다. 이 아름다움은 그 예술가들에게 아름다운 감옥이라고 한다. 이미 만들어져버린 아름다운 감옥 안에서 어떤 찬란한 예술을 꿈꿀 수 있겠는가?

 

4장, 천재는 실용적이다 - 에든버러

지성에 불씨를 당기는 데는 금지된 배움만한 게 없다.

https://www.dfds.com/ko-kr/passenger-ferries/destinations/scotland/sports-and-events/six-nations-murrayfield-stadium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도 스스로에게 놀랐음이 틀림없다. 여느 황금기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의 찬란한 시절도 극히 짧아서 5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 기간 동안 소도시 에든버러는 현대의 저술가 제임스 버컨 말마따나 "서구 지성을 지배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화학, 지질학, 공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 시, 회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분야 자체를 창조한 경우도 많았다.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으며 지질학자 제임스 허턴은 우리 지구를 근복적으로 새롭게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에든버러 아래쪽에 위치한 글래스고에서는 제임스 와트가 곧 산업혁명의 견인차가 되어줄 증기기관을 완성하느라 바빴다.
 알든 모르든 우리 모두 스코틀랜드를 조금씩 가지고 있다. 달력이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참고한 적이 있다면 스코틀랜드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변기 물을 내린 적이 있거나 냉장고를 이용한 적이 있거나 자전거를 탄 적이 있다면 스코틀랜드인에게 감사하라. 피하 주사를 맞은 적이 있거나 통증 없이 수술받은 적이 있거든 스코틀랜드인에게 고맙다고 말하라. 하지만 스코틀랜드인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정신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어 만질 수 없는 것이다. 

 스코틀랜드가 이렇게 다양하게 사회에 기여했는지 꿈에도 몰랐다. 특히 애덤 스미스가 스코틀랜드 사람이었을 줄이야. 우리가 학교다닐 때, 줄기차게 배웠던 '보이지 않는 손'... 의학이 에든버러에서 유명했다는 걸, 심지어 해리포터 작가 J.K.롤링이 에딘버러에서 해리포터를 썼다는 걸, 셜록 홈즈를 쓴 작가인 아서 코난 도일이 에딘버러 출신이었다는 걸.. 전혀 짐작도 하지 못 했고, 관심도 없었다. 1789년에는 에든버러시의 대학생 중 40퍼센트가 의대생이었다고 한다. 왜 이 시기에 의대생이 많았을까? 그것은 나라에서 존경받는 것이 그곳에서 양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인은 처벌받지 않는 선행은 없다고 생각한다. 화창한 날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마지못해 낙관주의를 품는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아니 적어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에든버러에서 가장 존경받는 시민들이, 자신들이 사랑하는 도시의 미래를 스물두살짜리 풋내기 건축가에게 맡긴 1767년 결정을 달리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스타 트렉>의 매력 덩어리 스코티도 빼놓을 수 없다.(드라마 <스타트렉> 속 엔터프라이즈호의 기관장 몽고메리 스콧은 스코틀랜드인으로 설정되었다) 그는 엔지니어이기에 천성적으로 조심성이 많다. 커크가 엔터프라이즈호에서 워프 드라이브를 좀 더 뽑아내라고 간청하면 스코티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안 됩니다, 선장." 안 된다고 말해놓고 어떻게든 해낸다. 천생 스코틀랜드인이다. 

 플라이팅(flyting)이란, "언어 폭력으로 적에게 창피를 주는 의례."란다. 한바탕 플라이팅을 퍼붓고 난 뒤, 맥주 한 잔 기울이면 앙금은 남지 않는다. 그들의 천재성은 대화에서 온다. 그리고 전문성의 연결고리에서 온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부분과 연결짓는 것을 굉장히 잘 한다고 한다. 그들은 교회의 말씀을 읽기 위해, 모든 국민이 문맹 퇴치를 했는데 이점으로는 다른 책들까지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이 책에서 얻는 사고를 통해 어떠한 전문 지식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들을 생성하기에 충분하다. 

 

5장, 천재는 뒤죽박죽이다 - 콜카타

매끄러운 표면에는 아무것도 달라붙지 않는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7/aug/27/the-epic-city-world-on-the-streets-of-calcutta-kushanava-choudhury-review

 물론 요즘은 천재라는 단어와 콜카타라는 단어를 한 호흡에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제 이 도시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무능한 정부가 대명사다. 제3세계의 비극을 한눈에 보여주는 곳. 하지만 그리 오래지않은 과거 이곳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대략 1840년에서 1920년 사이, 콜카타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지성의 수도이자 예술과 문학과 과학과 종교를 아우르는 창조성이 번성한 심장부였다. 이 도시는 노벨상 수상자(아시아 최초), 아카데미상 수상자, 동양권도 서양권도 아닌 엄청난 양의 문헌(런던을 제외하면 콜카타에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책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대화법('아다'라고 한다)을 쏟아냈다. 게다가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콜카타의 르네상스는 영국의 침략과 함께 번성되었다. 스코틀랜드도 잉글랜드에 합병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번성했는데, 콜카타 또한 영국 침략때문에 각성받아 르네상스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지진과 함께. 영국령 인도의 수도 콜카타는 영국의 실험실이었다. 범죄 수사에 쓰이는 지문 감식법, 하수도와 가스등 설치 등 콜카타에선 늘 창조성이 혈액처럼 흘렀다. 콜카타는 풍부하지만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하지만 콜카타의 그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곤 한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아 올려진 책들이 쌓여 있어도, 책방 직원은 정확하게 사람들이 필요한 책을 찾아 준다. 모든 차를 정확하게 똑같이 끓여내기도 한다. "모든 위대한 이들의 업적을 특징짓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혼란에서 질서를 보는 능력"이라고 존 채드윅이 말한다.

 콜카타에는 직선이 하나도 없다. 전부 에둘러 간다. 심지어 대화조차도. 어휘를 사랑하는 벵골인들은 이런 비선형적 대화를 일컫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이는 '아다(adda)'라고 불리는데 벵골 르네상스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다는 요점 없는 대화이지만 요령 없는 대화는 아니다. 아다는 한낱 한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벵골인들은 아다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단언하며, 콜카타가 쇠락하고 소셜미디어가 흥하는 오늘날까지도 이 전통이 살아남았음을 자랑스럽게 언급한다. 아다는 특정한 주제가 없는 창조적 대화인 것이다. 

 

6장, 천재는 의도된 산물이 아니다 - 음악도시 빈

영감은 아마추어에게나 쓸모 있다고들 한다.

https://www.trafalgar.com/real-word/vienna-place-pilgramage-classical-concerts/

  오늘날 빈은 티끌 하나 없는 결벽증 환자 같은 도시일지도 모르지만, 18세기 후반에는 20만 명이 거주하는 지저분하고 붐비는 도시였다. 마차들이 거리를 질주하며 오물과 흙먼지를 일으켰다. 도시 위생을 위해 인부들이 하루에 두 차례씩 물을 뿌렸지만 허사였다. 소음도 심해 자갈길 디디는 말굽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천재는 사막에서 꽃피지 않지만 진흙탕에서는 연꽃처럼 핀다. 

 음악의 천재로 가득찬 도시 빈에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있다. 천재로 가득찬 장소는 축복이자 저주다. 어딜 보나 빈은 영감을 얻을 수 있지만, 늘 모방의 위험이,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도처에 존재한다. 이 두려움은 베토벤에게 평생 그림자를 드리웠으나 한편으로는 미개척된 새로운 길을 밟은 원동력이 되었다. 

 모차르트는 다작을 내는 만큼, 돈을 많이 벌었지만 모두 당구로 날려버렸다. 능력은 음악에 몰빵된 것이다. 그는 유흥을 정말 좋아했고, 그는 시끄럽고 어수선한 환경이 그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었다. 베토벤은 방 안이 돼지 우리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음악의 작곡 중 가장 중요한 청각을 잃었다. 이 외에도 많은 유명한 음악가들이 빈에 존재했다. 왜? 빈에서 음악을 듣는 청중도 음악을 잘 알았고, 돈이 있는 사람들도 예술에 돈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다만, 모차르트의 누나 또한 음악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의 능력은 마치 없었던 일이 된 것이다. 천재가 되기 위해서는 환경도 중요하지만, 어떤 시대에 어떤 젠더로 태어나는 지도 참 중요하다. 

 

7장, 천재는 전염된다 - 소파 위의 빈

언더도그, 균열과 모순에 응답하다.

https://globalarbitrationreview.com/new-rules-investment-disputes-in-vienna

 세기말 빈의 천재성은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았다. 도시의 모든 구석과 틈새에 스민 지적이고 예술적인 에너지에 천재성이 깃들어 있었다. 이 에너지는 캘리포니아 산불처럼 빠르고 맹렬하게 번졌다. 창조성이 전염되며 천재가 천재를 낳는다는 증거가 빈이다. 건축에서 패션, 기술,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훌륭하고 근대적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의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면 우아하고 꼬불꼬불하고 북적거리는 세기말 빈의 거리를 만나게 된다. 

 모차르트 시절부터 베토벤이 죽은 뒤로 브람스 한 명을 제외하고 황금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방향이 뒤바뀌고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6장에서는 거의 주 내용이 모차르트를 다뤘지만, 7장에서는 대부분 프로이트에 다루고 있었다. 에릭은 7장에서 천재를 다시 배출하게 된 빈의 비밀을 몇 가지 알아냈다. 첫번째는 '커피'였다. 세계 최초의 커피숍은 1554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시작됐지만, 빈의 커피숍은 싼값의 커피 한 잔으로 누구와도 가까이할 수 있는 클럽이 되었다. 빈의 커피숍에서 벌어진 집중력과 창의력 사고는 아주 높았다. 

 두번째 키워드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독일어를 사용한다. 철학자 중에는 독일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을까? 쇼펜하우어, 니체, 칸트, 괴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독일어권 철학자가 있다고 한다. 독일어는 철학적 사유에 알맞는 언어라고 한다. 독일어는 영어와 달리 온갖 수식어와 삽입구를 붙여도 문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세번째 키워드는 이민자이다. 20세기 천재들을 조사했더니 5분의 1이 1세대 또는 2세대 이민자였다. 이 역학관계는 오늘날에도 작용한다고 한다. 미국 인구에서 외국 태생 이민자의 비율은 13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미국 내 특허 중 삼분의 일 가까이와 노벨상 수상 미국인의 25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민자로 사는 것은 '가족의 불안정성'과 더불어 천재들의 가장 공통된 인생 경험 두 가지 중 하나다. 이런 것을 '다각화 경험'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황금기는 흐지부지해진다. 빈의 황금기는 펑 하고 끝났다. 말 그대로.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라는 젊은 세르비아인 암살자가 오스트리아의 추정 상속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저격하며 살해한 일이 1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문화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거인이었던 빈의 통치는 갑작스런 종말을 맞았다. 전쟁이 끝나자 이를테면 1920년대 파리와 베를린의 번성처럼 다른 유럽 국가 수도에는 볕이 들었지만 천재의 망토는 금세 대서양을 건너 서쪽으로 항해하여 신세계에 도달했다. 미국은 여느 천재의 장소와 달리, 덜 다채롭고 더 전문화되었다. 뉴올리언스와 재즈, 디트로이트와 자동차, 할리우드와 영화, 뉴욕과 현대 미술을 생각해보라. 

 

8장, 천재는 약하다 - 실리콘밸리

빨리 실패하고 더 잘 실패하라.

https://appleinsider.com/articles/21/07/04/apples-silicon-valley-hiring-issues-prompts-office-expansion-elsewhere

 이 책을 쓰려고 자료 조사를 하면 사람들은 으레 이렇게 물었다. "천재의 정의가 뭔가요?" 그러면 이렇게 반문한다. "스티브 잡스는 천재였나요?" 사람들은 언제나 열띤 반응을 보이는데, 딱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떤 사람들은 강조하듯 자기 아이폰을 흔들며 말한다. "그럼요, 그는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죠. 남의 아이디어를 훔쳤잖아요." 물론 그들도 하나는 인정한다. "마케팅 천재였거나 디자인 천재였을지는 몰라도요." 그들은 진정한 천재는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음을 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을 '과학 천재'라고 부르거나 모차르트를 '음악 천재'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들은 특정 분야를 넘어섰다. 천재는 다 그렇다. 
...(중략)
 실리콘밸리는 아이폰과 무척 닮았다. 놀라운 일을 하고, 이게 없으면 못 산다. 하지만 어떻게 돌아가는지, 속에 뭐가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애플은 케이스를 열지 말라고 경고한다. 열었다가는 나쁜 일이 생길 거라며. 고분고분하게 그 말에 따랐다. 내 손바닥에 이토록 완벽하게, 이토록 인체공학적으로 놓인, 반짝이는 신화적 금속판의 주인이 됐음에 만족하면서.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미래를 위한 혁신을 위해 천재가 나온다고들 하지만, 이 천재들은 사실 과거에 기반 되어 있다. 과거없이는 이런 창조물들이 나올 수는 없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신화만 잔뜩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많은 실패 덕에 생겨난 성공인 것이다. 실패를 하려면 잘 실패해야 한다. 실리콘밸리에 모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실리콘밸리에서 보여지는 영향력을 펼치곤 한다. 그럼 장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는걸까? 에릭은 말한다. 사람들은 다른 장소에 있더라도 실리콘밸리를 꿈꾸며 그들의 꿈을 펼친다고. 아무리 원격이 발달되더라도 장소에 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순 없는 것이다. 

 

# 결론

 글쎄, 믿고 보는 에릭와이너라 다큐형식을 책으로 풀어낸 이 스토리텔링이 좋지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행복의 지도>를 정말 감명깊게 봐서 그런지.. 딱히 큰 감흥은 없었다. 그래도 가끔씩은 여행을 가려고 책을 쓰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다음 책 <누구에게나 신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가 ebook으로 볼 수 있길 기다리는 중이다. 아무리 <천재의 지도>가 감명깊게 읽히지 않더라도 나름... 2022년 3월의 시간을 <천재의 지도>로 가치있게 보냈다고 볼 수 있다. 내 환경이 격동의 시기가 아니어서 내가 천재가 아님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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