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루시(Lucy by the sea)>,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우리는 모두 늘 록다운 상태에 있다.

2025. 4. 18. 13:13그냥,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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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교보문고


출처: 나의 교보문고 컬렉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어떤 글을 쓰는 작가인가?

 루시 바턴 시리즈는 내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품 중 가장 기다리는 소설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라는 작가가 좋은 점은 그녀의 책을 읽으면, 그 소설 안에서 세계관들이 확장되어 있어 어느 캐릭터 하나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는 점이다. 각각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가끔 소설에 출연하곤 한다. 1인칭 시점으로 바라봤던 어떤 인물의 삶을 제 3자의 시점으로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올리브 키터리지>,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읽으면서 많은 인물들의 다채로운 삶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단편 소설이지만, 모든 캐릭터들이 같은 세계관 안에서 연관되어 있어 놓을 수가 없다. 어찌보면 3류 인생 같은 허접한 이야기를 가진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나름 그들의 인생 안에선 대소사를 다루고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작품의 캐릭터들의 철학, 감정과 깊이는 당연히 작가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스트라우트의 책을 읽다보면, 나는 그녀가 갖고 있는 철학과 깊이에 감탄을 하게 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건지 궁금했다. 나도 이 작가만큼이나 누군가를 이렇게 받아들여줄 수 있을까? <오! 윌리엄>에서 "우리는 결국 타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자신에 대해서도. 아주 조금만 알 뿐."이라고 언급했고, <내 이름은 루시바턴>에서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은 아주 많은 부분이 추측으로 이루어진 듯하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겸허한 태도를 갖고 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포용하려는 그녀의 위로방법이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바닷가의 루시>는 어떤 내용인가?

 이 책은 코비드19가 생기면서, 갑작스레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온 세계가 락다운(lockdown)되었던 때를 이야기한다. 지금이야 우리는 그런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의 삶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카오스 그 자체였다. 기생충학자인 윌리엄(루시 전남편)은 이런 정보를 미리 입수하여 루시를 데리고 메인주에 있는 펜션으로 간다. 그렇게 루시는 뉴욕에서의 생활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게 되고, 윌리엄과 함께 메인 주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나가는 내용이다.

 코비드19로 인해 친한 친구 1명과 가족 1명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딸들은 이런 팬데믹 상황 속에서 개인적인 아픔을 겪는 시기였고, 딸들은 부모의 그릇된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겼다며 원망하기도 한다. 윌리엄은 썩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루시와의 결혼생활 중, 그녀의 친구와 함께 바람이 나서 이혼했다. 근데 윌리엄은 진짜 사랑을 해서 바람이 났다기 보다 그는 애정결핍이 심했고, 바람 중독에 걸린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루시는 그가 옳지 못한 행동을 했던 것을 알지만, 그를 오래 미워하고 탓하진 않는다. 그렇게 둘이 메인 주에서 단 둘이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합치기로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녀들은 또 뒤집어지기도 하고... 

이혼했던 부부가 늘그막에 다시 재혼하는 이야기? 라고 볼 수 있지만, 나름 팬데믹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다룬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늘 록다운 상태에 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나는 너무 슬펐다. 어린 시절에 고립되어 보낸 두렵고 외로운 시간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 내 삶의 각기 다른 시점에 깨달은 것처럼- 깨달았다. 
 내 어린 시절은 록다운이었다.

 루시는 어릴 적부터 학대와 가난에 시달리면서 성장해왔다. 그녀의 집은 먹을 것도 없었고, 늘 추웠고, 텔레비전도 없어 남들이 보편적으로 접하는 문화생활 또한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전액 장학금을 받고, 집을 떠나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윌리엄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저명한 작가가 되었다. 그 성공한 역사가 그녀를 온전히 변하게 만들지 못했다. 루시의 언니는 그녀가 가족들을 배신한 배신자라고 여겼고, 동네 사람들은 뉴욕 새침떼기 다 됐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70살이 넘은 루시 자체는 근본적으로 어린 시절 가난하고, 추웠던 어린 루시 안에 갇혀 있다. 그녀가 그렇게 갇혀 있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가상의 따스한 엄마'를 설정해 놓고 상상의 위로를 얻곤 했다. 

 루시 뿐만이 아닌, 윌리엄도 결핍 속에서 커왔다.  윌리엄의 어머니, 캐서린은 루시보다도 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농부의 아내로 팔려갔다. 하지만 캐서린은 독일군과 눈맞아 도망쳤고, 윌리엄을 낳았다. (독일군 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셨고, 알고보니 아버지의 집안은 나치집안이었고 상당히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다. 캐서린은 절대 물려받지 말라고 했지만, 훗날 윌리엄은 그 돈을 물려받았다.) 캐서린은 이미 첫번째 결혼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를 두고 왔다는 죄책감에 윌리엄을 잘 안아주지 않았다. 캐서린의 이런 행동들이 윌리엄에게 불안정한 애착을 형성하게 됐고, 이런 감정적 허기를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해 여러 여자들을 만나면서 채우는 외도 중독에 빠졌다. 

 루시와 윌리엄의 자식들, 크리시와 베카는 훌륭하게 큰 성인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아버지가 외도를 하는 모습, 감정적 허기를 느끼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이용하는 모습, 어머니의 맞바람, 어머니의 도피성 가출,... 이 모든 것들을 보고 성장해왔기 때문에 그들 또한 정서적인 결핍을 느끼면서 자라왔다.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랐는데, 갑자기 70대가 된 부모들이 갑자기 합치게 됐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걸 보고 환멸을 느낀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보이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았고 힘든 순간들이 많았는데, 부모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하면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이들이 가진 어린시절의 결핍은 평생 록다운으로 살게 만들었다. 우리 삶의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결핍은 나이가 들어서도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 결핍을 채워나가는 것이 인생의 과제인 것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말한다. 루시가 말하듯이 "내 어린 시절은 록다운이었다"고 하는 것은 분명, 지금은 팬데믹이 끝나서 해쳐나가는 중인 것처럼 그녀의 현재의 삶은 록다운이었던 어린 시절을 매꿔나가는 중이 아닐까?

"나도 그만큼은 알았다"

“더 꼭.” 내가 말했다. “더 꼭.”
그러자 윌리엄이 잠시 나를 떼어내고 “내가 여기서 더 꼭 끌어안으면 당신 뒤에 가 있게 될걸” 하고 말한 뒤 다시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두 팔이 나를 감싸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조용히 말했다. “사랑해, 루시 바턴. 어떤 일이 있어도.”

 루시와 윌리엄은 서로의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윌리엄을 만나기 전, 루시의 세상은 흑백이었다.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고 자란 루시는 어떤 재밌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예능을 접하지 못했고 그저 책을 통해 바라보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윌리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여자들과의 외도를 통해 증명해 나갔지만, 한편으로 누군가를 위해 신경써서 보여주고 제공한다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이 든다. 윌리엄은 루시에게 많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녀가 무탈하기를 늘 바라왔다. 윌리엄이 느지막히 얻은 딸 브리짓한테 하는 정성을 보면 루시를 얼마나 사랑해왔는지 알 수 있다.  

 사실 루시 시점에서 우리가 읽어서 그렇지, 일반적으로 친해지기 어려운 독특한 사람이라고 느낄 것 같다. 루시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이 그냥 친해지라고 한다면, 변화를 싫어하고 온도에 민감하며 그녀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습득하는 속도가 조금 느리다. 한 번 친해지려면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야 할 것 같았던 그녀지만, 윌리엄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루시는 윌리엄을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친구와 외도를 하더라도, 그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두려움을 갖더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깊게 들어주지 않더라도, 그가 고집불통이더라도... 그저 윌리엄을 받아들였다. 어쩔땐 그를 가여워하기도 했다. 루시가 윌리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세계"라는 것을 제공해줬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죽은 전남편 데이비드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집이라고 느끼진 못했다. 진짜 집은 윌리엄과 함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루시가 윌리엄은 그녀의 진짜 고향이라는 느꼈던 것 같다.  루시의 자녀들, 베카와 크리시는 "아빠는 엄마를 이용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근데 아닐지도 모른다. 루시는 이제 그만큼은 아니까.


 왜 저렇게 살까? 사이다 전개는 왜 없을까? 저 빌런같은 인간이 왜 주인공일까? 왜 주인공은 이렇게 답답할까? 이런 마음이 들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다. 인간은 모두 양면성을 갖고 있고, 입체적이다. 그 찰나의 내 모습이 내 인생 전체를 정의할 수 없다. 나는 그래서 이 작가의 책을 읽는게 좋다. 내 결핍도, 허기도, 오만도, 그저 나의 찰나일 뿐이고 다시 매꿔나갈 수 있을 용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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