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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철학 독서 챌린지]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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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ES24

제5장 도덕의 박물학

사람들의 관심이 오로지 집단의 보존에만 향해 있고 부도덕이란 것이
오직 집단의 존속에 위험한 것과 동일시되는 한, 아직 '이웃사랑의 도덕'은 존재할 수 없다.

 

191. (...) 그는 자신을 자신의 보다 예민한 양심에 비춰보고 자신을 심문해본 후, 자신도 역시 다른 아테네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위의 동기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고 설명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이렇게 설득했다. 무엇 때문에 본능에서 벗어나야 한단 말인가! 본능과 마찬가지로 이성도 정당한 대우를 받도록 배려해야 한다. 본능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경우에 본능에 적절한 근거를 제공하여 본능을 뒷받침하도록 이성을 설득해야 한다. (...)

  소크라테스는 본능 자체를 인정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본능대로 행동할 경우, 그에 따른 명분을 설명하기에 애쓰는 인간의 모습을 얘기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서 누군가에겐 긍정적인 영향력이 끼칠 수도 있고, 부정적인 영향력이 끼칠 수도 있다. 분명한건 내 행동과 동기는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주차장에서 접촉사고를 낸 적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그대로 0.1초 정도 도망쳐버릴까 고민도 했다. 그 생각은 오랫동안 끌지 않는다. 빛의 속도로 순간적으로 지나가버린다. 하지만 나는 접촉사고 낸 차량에 전화를 하고 기다렸다가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고, 절차대로 처리하며 다음 날 사과까지 얻었다. 누군가가 보면 응당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찰나 정도 부끄러운 고민을 했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내 행위와 진짜 마음은 늘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접촉사고를 낸 직후, 카페에 들러 카페 사장과 웃으면서 농담 따먹기를 했다. 그 와중에 카페 사장과 대화를 하던 중에 정적이 흐르면 접촉사고를 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사장이 말을 시키면 나는 다시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모든 인간이 늘 옳은 생각만 한다고 믿지 않고, 니체의 말대로 옳고 그름(그리고 선과 악)은 시대와 환경이 정하는 것이지, 그 도덕대로 인간이 태어나 자연스럽게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속마음이 어떻든지 간에 그 시대에 맞는, 상황에 맞는 옳은 선택을 하는게 현대인의 몫이란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192. (...) 우리는 체험의 대부분을 지어내며 어떤 것을 관찰하든 간에 '꾸며내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옛날부터 거짓말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보다 고상하고 위선적으로 말한다면, 요컨대 보다 듣기 좋게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술가라는 것이다. 활발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나는 종종 상대방의 얼굴이 그가 말하는 사상이나 그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으로 내가 믿는 생각에 따라서 명료하면서도 섬세하게 규정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나의 시각 능력은 사실 이 정도로 명료하게 볼 수는 없다. 

  우리 스스로는 각자 생각과 행동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인간은 거짓말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데, 여기서 위선적인 행동은 상대를 마치 알고 있다는 착각과 오만함인 것이다. 내가 숨기듯 너도 숨기겠지, 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은 상대의 미묘한 표정을 보고 이미 상대를 파악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 그 속을 알 수 없다. 

 

201. (...) 그들의 내부에 숨어 있는 수천 개의 다양한 도덕적인 의식으로부터 항상 동일한 도덕적 명령을, 즉 "우리는 언젠가는 두려워할 아무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란다!"라는 겁 많은 무리동물의 도덕적 명령을 끌어내야만 할 것이다. 이날[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는 날]에 도달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이 오늘날 유럽에서는 어디에서나 '진보'라고 불리고 있다. 

 인간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도덕이란 사회적인 배경, 문화, 환경 등에 의해 바뀌고 또 바뀐다. 당연시 되던 과거의 도덕윤리는 현대에 와서는 말도 안되는 모습을 띄고 있기도 하고, 국가마다 갖고 있는 문화와 관습에 의해 도덕윤리가 정의되곤 한다. 우리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따질 때는 내가 가진 환경을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사실 이 땅에 옳고 그름, 선과 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범죄들이 왜 "악"하다고 생각하는가? 예를 들면 동물들은 지들끼리 물어뜯고 먹고 싸우는데, 인간의 살인, 사기, 마약, 폭행 등은 왜 나쁜 것일까? 왜냐하면 이 무리사회를 통치하고 융화해야 하는데, 그런 범죄들이 이 사회 융화에 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을 통해 범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에게 선과 악이라는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과 악, 옳고 그름은 분명 당연히 존재하는 하는 진리도 아닐 뿐더러, 시대, 환경 등에 따라 그 도덕은 언제나 바뀔 수 있다는걸 인정해야 한다. 어차피 세상이 그런건데, 현시대의 도덕윤리를 파악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가? 솔직히 지금 내 생각으론 파악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내비췄을 경우,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책임이 들어간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나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나를 많이 희생하지 않는 조건 안에서) 나와 타인이 덜 피해가 가고, 더 긍정적인 결말이 있는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옳고 그른 것, 선과 악,.. 이런게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에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최선과 차선으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6장 우리 학자들

204. 훈계라는 것은 발자크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입었던 상처를 겁 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하는 훈계도 그런 것이겠지만,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학문과 철학의 지위를 변경하려는 부당하고도 해로운 움직임에 대해서 반대하고 싶다. 

 잔소리 하기 싫지만 진짜 더 심각해지기 전에 한마디 하고 싶은 니체..ㅋㅋ 

205. (...) 철학자가 발전하는 것을 막는 더욱 큰 장애물은 그가 자신에게 학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생과 인생의 가치에 대한 판단, 즉 긍정이나 부정을 요구하며 싫어도 자신이 그러한 판단을 내릴 권리나 심지어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참된 철학자는 '비철학적으로', '현명하지 못하게', 무엇보다도 약삭빠르지 않게 산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가? 나의 친구들이여. 그는 인생의 수백 가지 시련과 유혹을 감내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낀다. 그는 끊임없이 자진해서 모험에 뛰어들며 불리한 유희를 행한다. 
210. (...) 그들은 인도주의적인 인간들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냉혹할 것이다(그리고 아마도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냉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진리가 그들을 '기쁘게 하거나' '고무시키거나' '가동시킨다'는 이유로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212. (...) 오늘날에는 고귀하게 존재한다는 것, 독립적으로 존재하려고 한다는 것,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홀로 서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위대함'이라는 개념에 속한다. 철학자가 다음과 같이 주장할 때 그는 자신의 이성의 일면을 드러내게 된다. "가장 고독하고 가장 은폐되어 있고 [무리로부터] 가장 이탈해 있는 인간, 선악의 저편에 있는 인간, 자신의 덕들의 주인으로 존재하는 인간, 의지로 넘치는 인간, 이러한 인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이면서 다양하고 폭이 넓으면서도 충만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위대함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오늘날 위대함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나만의 세계를 갖고 있고, 그대로 살아가는 '기존쎄'의 삶. 가끔씩 우리는 '기존쎄'인척 하고 살아가는 듯하다. 저 사람은 분명 다를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내 추측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위와 같은 위대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당사자는 진정으로 인정할까?

 


제7장 우리의 미덕

215.(...) 우리의 행위는 차례로 다양한 빛깔을 띠며 하나의 빛깔만 지속적으로 띠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우리가 동시에 다양한 빛깔을 띠는 행위를 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니체가 계속 강조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겐 많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의 미덕이 있을지언정 다채로운 나는 늘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17. 자신이 민감하고 섬세한 도덕적인 분별심을 가졌다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중시하는 사람을 조심하라! 그들은 우리 앞에서 한 번이라도 잘못 행동하게 되면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이 여전히 우리의 '친구'로 남아 있을 경우조차도 그들은 반드시 우리를 본능적으로 비방하고 중상하려고 할 것이다. 잘 잊어버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어리석음도 '깨끗이'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예민하게 도덕적인 분별심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니 '칸트'가 생각이 난다. 티비나 드라마 혹은 주변 사람에게서, 또는 나의 과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나는 어떤 '분야' 안에서는 완벽하다고 생각하나 누군가에게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면, 그 모습을 본 상대방을 괜시리 피하고 싶다. 어쩌면 수치심이 생각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219. 도덕적으로 심판하거나 단죄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뒤떨어진 자들이 덜 뒤떨어진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즐겨 행하는 복수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재능을 제대로 타고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일종의 보상을 받으려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는 정신을 획득하여 세련되기 위한 기회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악의가 사람들을 지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
225. (...) 고통을 견디는 훈련, 거대한 고통을 견디는 훈련, 그대들은 이러한 훈련만이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고양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영혼의 힘을 강화시켜주는 불행 속에서 영혼이 느끼는 긴장, 위대한 파멸을 눈앞에 볼 때 영혼이 느끼는 전율, 불행을 짊어지고 견뎌내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독창성과 용기, 그리고 또한 일찍이 비밀, 가면, 정신, 간지, 위대함에 의해 영혼에게 선사된 것, 이것들은 고통을 겪으면서 그리고 거대한 고통의 훈련을 겪으면서 영혼에게 선사된 것이 아닌가?
227. (...) 우리 자유로운 정신들이여, 우리의 성실성이 우리의 허영이나 화려한 장식, 우리의 한계, 우리의 어리석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모든 덕은 어리석음이 되고, 모든 어리석음은 덕이 되는 경향이 있다. '성스러울 정도로 어리석다'고 러시아 사람들은 말하지만 우린느 성실함으로 인해 마침내 성자나 따분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인생은 따분하게 살기에는 백번을 산다고 해도 너무나 짧지 않은가? 그렇게 살려면 정녕 영원한 삶을 믿어야만 할 것이다. 

 사회에서 덕이 되는 무언가를 향한 성실함,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닐지라도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실하게 행했을 때,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사회가 원하는 성실함은 결국 다른 세계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 시기에 필요한 이용가치일 뿐이다. 농업사회에서는 성실하게 농업에 열중한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보다도 돈을 많이 벌도록 성실히 저금하는 것... 이렇게 사회에서 추구하는 점을 기준으로 내가 성실히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으로 내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니체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230.(...) 성실성, 진리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 인식을 위한 희생, 진실한 인간의 영웅적 행위와 같은 것은 아름답고 찬란하고 청아한 축제의 언어에 지나지 않지만, 그와 같은 말들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부심으로 부풀게 만드는 무언인가가 있다. 그러나 은자이자 마멋(Murmelthiere)인 우리는 오랜 동안 은자의 양심 깊숙한 곳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스스로 다음과 같이 다짐해왔다. 이 귀중해 보이는 화려한 말들도 인간의 무의식적인 허영심에서 비롯된 해묵은 거짓 장식과 허섭스레기, 가짜 금가루에 지나지 않으며, 이렇게 아첨하는 빛깔과 장식 밑에서 자연 그대로의 인간(homo natura)이라는 끔찍한 본바탕이 다시 분명하게 인식되어야만 한다고. 즉 인간을 자연 속으로 되돌려 옮겨놓는 것, 이제까지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라는 저 영원한 보바탕 위에 서툴게 써넣이지고 그려진 공허하고 몽상적인 많은 해석과 함축을 극복하는 것, 오늘날 이미 인간이 학문의 훈련을 통해 엄격하게 단련되어 다른 자연 앞에 서 있듯이 앞으로 이 인간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모르는 오이디푸스의 눈과 봉해진 오디세우스의 귀를 가지고 너무나 오랫동안 "그대는 자연 이상의 존재이며, 귀를 막고 인간 앞에 서게 하는 것, 이것은 실로 기묘하고 광기에 찬 과제인 것 같지만 그것이야말로 실로 진정한 과제인 것이다. 그 누가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광기에 찬 과제를 선택했는가? 또는 달리 말해 "도대체 왜 인식은 존재하는가?" 누구나 우리에게 이에 대해 볼어볼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식의 질문을 제기하도록 내몰려서 이미 백번에 걸쳐서 자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보다 나은 답을 발견하지 못했고 지금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이 세상에 탄생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보지 못한 신의 뜻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에도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 의미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태어나서 죽는 자연에서 태어난 산물 그 자체일뿐이다. 분명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 태어난 모든 생명들은 다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저 우리만의 제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인데, 감히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역할은 환경을 덜 파괴하는 선에서 지구가 끝내 잘 순환할 수 있길 돕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가끔 니체가 말하는 여성상에 대해 좀 열심히 집중을 해봐야 알 것 같다. 시대상 나는 니체가 여성에 대한 선입견과 전통성을 응당 요구한다고 느꼈지만, 읽다보면 또 여성성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시대에 따라 바뀐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 생각으로 여성들에게 하는 말은 뭔가 여우처럼 굴어 여성성도 챙기고, 권력과 영리함도 챙기라는 말처럼 들린다.


제8장 민족과 조국

 니체는 자신이 생각하는 독일과 독일인의 특징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듯하다.

244. (...) 독일인의 특징은 그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정의를 내리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오류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독일의 영혼 속에는 수많은 통로와 샛길이 있다. 그 속에는 동굴과 은신처 그리고 지하 감옥이 있다. 그 무질서함은 신비로 가득 찬 매력으로 넘친다. 독일인들은 혼동으로 이끄는 샛길을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자신과 유사한 것을 사랑하듯이 독일인도 구름을 사랑하며, 불명료하고 생성 중에 있으며 어슴푸레하고 눅눅하고 감춰져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모든 종류의 불확실한 것,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 비정상적인 것, 성장하고 있는 것을 그는 '심오하다'고 느낀다. 독일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생성 중에 있으며 '발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발전'이란 용어는 철학적 공식들의 거대한 왕국에서 진정으로 독일적인 고안물이자 성공작이다. (...)

  어느 민족의 특성에 대해 읊으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개개인마다 심오함과 가벼움이 다 다른 법이다. 물론, 그 나라만의 문화와 환경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어떠한 특색은 갖추고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우리끼리 하는 말인거고, 잘 알지 못하는 다른 민족이 그 민족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249. 모든 민족은 각각 특유의 위선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미덕이라고 부른다. 
251. 나는 유대인에 호의를 가진 독일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갑자기 251번의 문장을 읽고, 히틀러와 니체의 연관성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인물활동 시기주요 사건>

니체 1844년 - 1900년 * 1869년: 바젤 대학교 교수 취임
* 1879년: 건강 악화로 교수직 사임
* 1884년: 『차라투스트라 이렇게 말했다』 출간
히틀러 1889년 - 1945년 * 1919년: 독일 노동자당 입당
* 1921년: 나치당 당수 취임
* 1933년: 독일 총리 취임
* 1939년: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1945년: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

 니체와 히틀러는 실제로 만난 적은 없으나, 히틀러가 니체의 철학을 자신의 정치에 악용했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 니체는 절대적인 선악이 아닌 상대적인 선악이라고 주장했는데, 히틀러는 그 부분을 토대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펼쳤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철학이라는게 참 무섭다고 느껴졌다. 명성이 있는 사람이 어떤 말을 내뱉어도 사람들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은 전부 다른 것인데, 힘이 있는 사람이 사상을 잘못 받아들이게 됐을 경우 정말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어찌 되었든간에, 내 행동으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책임이 생기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257. 인간이란 유형이 이제까지 모든 면에서 향상되어온 것은 귀족사회 덕분이었다. (...) 억압과 배제를 연마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거리의 파토스가 없었다면, 저 다른 보다 신비한 파토스, 즉 영혼 자체 내에서 거리를 항상 새롭게 확대하려고 하는 열망, 보다 드높고 보다 희귀하며 보다 멀고 보다 넓으며 보다 포괄적인 상태를 형성하려는 열망은 전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인간'이란 유형의 향상,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 극복'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 불굴의 의지력과 권력욕을 갖는 맹수와 같은 인간들이, 보다 약하고 보다 교화되었으며 보다 평화적이며 아마도 상업이나 목축에 종사했던 종족들 혹은 그 마지막 생명력이 정신과 퇴폐의 찬란한 불꽃 속에서 꺼져가고 있던 노숙한 고대문화를 습격했던 것이다. 귀족계급은 처음에는 항상 야만계급이었다. 그들의 우월성은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힘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보다 완전한 인간이었다.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주인 도덕 노예 도덕
- '선'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지배자들
- 우월함과 위계질서를 규정하기에
   '탁월함'<-> '저열함'
    / '고귀함' <-> '비천함'으로 대립하여 정의한다.
- 자신들을 '우리 진실된 자들'이라고 부름
- 강약약강 

- 훌륭한 인간이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인간
- 저열한 인간이란? 경멸을 불러일으키는 인간
- 학대받고 억압받고 고통당하고 자유롭지 못한 자신이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도덕을 운운하는 경우
- 강자의 덕을 열등감을 느낀다.
- 자기합리화를 위한 도덕; 연민, 호의, 온정, 인내, 근면, 겸손 친절
-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
- 유용성의(공리주의적인) 도덕

- 선한 인간이란? 위험하지 않은 인간
- 악한 인간이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인간
262. (...) 영양을 과잉으로 공급받고 일반적으로 지나친 보호와 배려를 받은 종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현저한 방식으로 유형의 변질을 초래하기 쉽고 기형적인 것과 기괴한 것들(기괴한 악덕들조차 포함하여)을 낳기 쉽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육자들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귀족 사회에서 자신들의 계급 사회, 아래 계급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올려다 보지도 못할 집단을 만들기 위해 양성을 오랜 시간동안 하다보면 기괴해질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 같다. 처음에는 우러러볼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가 있었다면, 그들 사이에서도 폐쇄적인 사회에 만들어지며 자유를 갈망하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264. (...) 만일 우리가 어떤 부모에 대해서 몇 가지를 알고 있다면 그들의 자식이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역겨울 정도의 무절제, 음험한 시기심, 항상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고집 - 이 세 가지는 함께 어떤 시대에서든 항상 천민적인 인간의 전형적인 특성이었지만 -, 이것들은 나쁜 피와 마찬가지로 자식에게도 반드시 유전된다. 사람들이 최상의 교육을 받고 최상의 교양을 쌓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유전적 특성은 제거할 수는 없고 기껏해야 숨길 수 있을 뿐이다. (...)
극히 민중적인, 다시 말해 천민적인 우리 시대에 '교육'과 '교양'은 본질적으로 속이는 기술일 수밖에 없으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몸과 영혼 속에 깃든 혈통과 유전되어온 천민근성을 숨기는 기술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무엇보다도 진실할 것을 설교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진실하라! 자연스럽게 행동해라!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라!"라고 호소하는 교육자가 있다면, 그렇게 유덕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멍청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본성을 제거하려고 호타리우스의 갈퀴를 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본성을 제거할 수 있을까? '천민근성'은 항상 되돌아오는 법인데. 

 요즘 사람들은 '공부는 유전이다.', '피부는 타고난 것이다.'... 등 이미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포기를 해버리곤 한다. 위의 구절을 보니 그 생각이 갑자기 났다. 오은영 박사님도 말씀하셨지. 사람이 타고난 기질이라는게 있다고. 

265. (...) 고귀한 인간은 대체로 '위'를 올려다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다만 느긋하게 똑바로 앞을 바라보거나 내려다볼 뿐이다. 그는 자신이 높은 곳에 있음을 알고 있다. 

 고귀하다는 '이기심'과 동일시하고 있다. 자신이 갈망하는 것, 자신이 원하는 위치 등을 생각하면서 오롯이 그것에만 집중을 하는 사람이다. 그 자체로 실제 계급과는 별개로 스스로 가장 높은 곳에 있다고 느낀다. 그저 고귀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 뜻은 자신의 존재 또한 부정하지 않겠다는 말을 의미한다. 

275. 다른 사람의 고귀한 점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천박하고 표면적인 점은 그만큼 더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 자신의 정체를 폭로한다.
 284. 광대하면서도 의연한 평정 속에서 살 것, 항상 초연하게 살 것. 자신의 감정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갖거나 갖지 않고, 잠시 동안 그것들과 마음 편히 어울릴 것, 말을 타듯, 때로는 당나귀를 타듯 그것들 위에 올라 탈 것. 우리는 그것들의 불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어리석음도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삼백 개의 표정을 짓고 검은 안경까지 쓸 것.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우리의 눈 속을, 더구나 '마음속'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의라는 저 교활하고 명랑한 공손함을 동반자로 삼을 것. 용기와 통찰과 공감과 고독이라는 네 가지 덕의 주인으로 항상 존재하는 것, 왜냐하면 고독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에서의  - 모든 접촉에는 불가피하게 더러움이 개재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헤아리고 있는 성향이자 충동, 즉 청결함을 향한 숭고한 성향이자 충동으로서의 덕이기 때문이다. 모든 공동체는 어떤 식으로든, 어떤 곳에서든, 어떤 때든 사람들을 '천박하게' 만든다. 

 


 참 두 달 넘게 야금야금 읽었던 첫 니체의 책이었다. 어찌나 처음에는 딴 세상 말같아서 힘들었던지... 그래도 조금씩 이해해보려고 검색해가면서 읽으니... 교수나 박사들이 한 해석에 맞게 잘 이해했는지는 확신이 들지 않지만 나 스스로 얼추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읽다가 들었던 생각이 히틀러도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그런 정치를 벌였는데...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내가 나아갈 인생관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이해한 내용이 나쁘게 생각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상대적인 선악이 존재한다는 것과 고난과 슬픔이 있어야 행복을 알 수 있다는 말,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오만함,... 등등 어찌보면 이 책을 읽고 나서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그에 따른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는 것, 이미 벌어진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생각하는 것, 내가 속으로 무슨 사악한 생각을 해도 결국 내가 한 행동이 진짜 '내'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 행동을 하게 되면 언제나 그에 맞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 

 아직 <선악의 저편> 한 권으로 니체를 알았다고 볼 수 없다. 다음 책은 <우상의 황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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