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1), 나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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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포터 (Andrew Porter)
197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자랐다. 뉴욕의 바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아이오와 대학 작가 워크샵에서 예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이오와를 떠날 때쯤 제임스 미치너 펠로십을 받으면서 휴스턴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하루에 여섯 시간씩 소설 창작에 전념하며 소설집 출간 준비를 마친다. 그때가 1999년, 포터는 아직 서른이 안 되었을 나이였다. 하지만 이즈음 도둑을 맞아 집이 털리는 사고를 당하는데 원고를 통째로 분실하고 만다.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쓰려 했지만 정확한 어조와 표현은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몇 년 동안 생계유지를 위해 지역 글쓰기 센터에서 강사를 하는 등 힘든 세월을 겪으며 작가의 길을 거의 포기하기에 이른다. 돌파구는 2001년에 가까스로 메릴랜드 대학에서 방문 작가 자리를 얻으면서 열린다. 다시 작가의 길로 접어들면서 발표한 단편들이 유명세를 타게 되는데, 「아술」은 스티븐 킹이 선정하는 『2007 미국우수단편선집』에 들어갔으며, 「외출」은 푸시카트 상을 받으면서 미국공영라디오에 소개되었다. 주위에선 무엇보다도 돈이 되는 장편소설로 선회하기를 권했으나, 포터는 작가에게는 자신만의 호흡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임을 알았다고 한다.
아이오와 시절부터 혼자 일하는 스타일로 주위 사람들에게 원고를 잘 보여주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 작품마다 일인칭 화자를 꼭 등장시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인물 스스로 목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친밀감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사』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의 화자를 좋아하며, 존 치버와 리처드 포드의 작품을 선호한다고 밝힌다. 2008년에 출간한 처녀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으로 단편소설 부문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했으며, 스티븐 터너상, 패터슨상, 프랭크 오코너상, 윌리엄 사로얀상 최종후보작으로 뽑혔다. 당시에는 조지아 대학 출판부라는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수상 후 2010년 랜덤하우스의 빈티지 출판사가 페이퍼백으로 재출간했다. 이후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 십여 개 국가에서 번역되어 나오면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현재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 살면서 연내 출간을 목표로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며, 트리니티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https://www.yes24.com/24/AuthorFile/Author/141716 ; YES24 앤드루 포터 작가 소개
06 외출
나는 가끔씩, 만약 내가 그날 밤 그 아이에게 아미시를 떠나라고 - 나와 결혼해서 나와 내 가족과 같이 살자고 -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그때에도 그런 말을 해볼까 생각을 했었지만 제안만으로도 자인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을 테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곧 대학에 진학하게 될, 아주 훌륭한 학생이었으니까.
'나'와 테너는 부잣집 태생은 아니었지만, 부잣집이 있는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 동네 근처에는 아미시들이 살고 있었는데 아미시들은 넓은 땅에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고 있었고, 그들의 집단에서 자체적으로 사회를 만들고 있었다. 아미시의 자녀들은 폐쇄적인 사회에서 한 번씩 바깥 세상 구경을 하곤 했는데, '나'와 태너는 아미시 집단에서 레이첼이라는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아미시들은 자급자족하며 잘 살고 있었지만, 점점 땅을 팔면서 아미시의 공동체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레이첼은 그 공동체와 함께 떠나게 됐었다. 레이첼은 떠나기 전, '나'와 함께 일탈을 꿈꿨지만, '나'는 그녀와 함께 반짝이는 일탈을 했을 뿐 다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마지막으로 보게 되었고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아미시 집단에서 아이작 킹이라는 키가 아주 큰 남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형이 죽고 난 후 다른 동네 아이들과 싸움을 하면서 다녔다. 그는 입버릇처럼 아미시를 떠나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어느 때처럼 싸움을 하다 그는 뇌혈전으로 죽게 되었다.
<빛과 물질에 대한 이론>에서 몇몇 작품들은 1인칭 화자를 기준으로 '방관자'에 대해 글을 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미시라는 집단에서 자라는 청소년들을 마주하는 아미시가 아닌 집단의 아이들. 그들은 아미시 사회에 있는 아이들을 해방 시켜줄 수 있는 힘도 없고, 의지도 없다. 하지만 그들이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은 몸소 느끼고 있다. '나'는 한때 사귀었던 레이첼을 그 집단에서 빼올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왜냐,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해당 사회에 대해 그냥 지켜보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수동적이고 비겁한지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내가 뭘 할 수 있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내가 만약 방관하지 않고, 무언가를 나서려고 한다면 평화로운 나의 삶을 다 뒤집어 엎어버려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방관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나치지 않고 나서는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07 머킨
린이 내게 다가와 팔을 두른다. "당신은 당신이 누군지 알아?" 그리고 잠시 후 자기 쪽으로 나를 당기며 말한다. "당신은 나의 비어드야."
"비어드는 게이 남자들만 두지 않나요?
"아니, 레즈비언들도 비어드를 둬."
"뭔가 다른 말로 불러야 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몰라요." 나는 적당한 말을 생각한다.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만한 말로.
"머킨**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 그녀가 마침내 말한다. "한 번 들은 적이 있어. 비어드의 남성형"
그리고 그녀는 내게 기대 키스를, 이번에는 입술에 한다. 술에 취해 하는, 무의미한 키스.
*비어드(beard) : 일차 의미는 턱수염. 동성애자가 공공장소에서 곁에 두는 이성 파트너를 가리킨다.
**머킨(merkin) : 일차 의미는 가짜 음모. 공공장소에서 동성애자 여자의 파트너 역할을 하는 남자를 가리킨다.
'나'는 린의 머킨(merkin)이다. 그는 린보다 15살이나 어린 나이이고, 린은 델핀이라는 여자친구를 갖고 있는데 델핀 또한 '나'와 같은 나이 또래이다. 린은 동성애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에게 '나'를 소개시켜주며 아닌 척 위장을 하고 있었다. 린은 델핀과 헤어지게 되고, '나'와 함께 유럽 여행을 계획한다.
'나'는 린을 만나기 전 로렌이라는 여자친구와 사귀다가 그녀의 바람으로 헤어졌다. 하지만 린의 위장 남자친구 역할을 하면서 로렌에 대한 감정이 무뎌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 둘은 서로에게 성적 욕망보다 존재 자체로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감정과 성적으로 끌리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시간과 성의, 연대 등으로 인해 쌓이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적이끌림은 정말 첫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성적이끌림에서 시작한 감정이 훗날 사랑이 되는 것이겠지만. '나'와 린은 성적 이끌림은 없지만, 둘은 그 자체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08 폭풍
누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언덕 지대를 바라다보았다. "모르겠어. 앨릭스, 난 이제 서른이 다 됐어. 서른." 누나는 말을 멈추고 술을 조금 마셨다. "리처드와 나는 삼 년을 사귀었어. 삼 년을 꼬박.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면 누군가를 알게 돼. 익숙해져버리게 된다고. 그이가 완벽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망할 새끼처럼 구는 경우가 안 그런 경우만큼 있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작년부터 그이가 우리를 위해, 우리가 좀더 나이가 들었을 때를 위해 따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어. 그게 자꾸 발목을 잡아, 그이가 벌써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앨릭스('나')의 누나는 여자친구로 두기엔 다소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누나는 유럽여행을 하던 중 에 남자친구와 다툼이 있었고, 그녀는 남자친구 리처드를 두고 왔다고 했다. 리처드는 여권도 돈도 없이 유럽에서 배회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두 남매의 엄마는 일찍이 남편(남매의 아빠)을 하늘로 보내고, 재혼을 했다. 엄마는 꽤나 재산이 있는 편이었는데, 남매들은 새아빠가 돈을 보고 결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아빠는 테니스를 치다가 복사뼈를 다쳐서 휠체어를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나'가 보기에 엄마는 새아빠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엄마의 재산을 사업으로 일부 날려먹기도 했다.
어느 날, 누나는 유럽에 두고 온 남자친구 리처드에게 연락이 왔다고 했다. 사실은 리처드가 혼자서 여행을 하고 싶다고 누나를 버려두고 홀로 여권과 돈을 챙겨 여행을 했던 것이다. 누나는 리처드에게 많은 실망을 한 상태였지만, 3년의 연애를 끝낼 수 없었기에 그저 그렇게 리처드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번 소설은 읽다가 모르고 건너뛰어 가장 마지막에 읽게 되었다. '나'는 두 여자의 사랑을 관찰하고 있다. 어머니와 새아빠와의 관계, 누나와 리처와의 관계. '나'는 그 관계가 못마땅하지만 그들의 삶을 자신이 바꿀 수는 없으니 필요할 때 위로가 되어주는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을 읽을 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유난히 떠올랐다. 처음에 설렘과 그렇게 쌓아올린 신뢰와 시간들은 별개로 오래된 연인들은 불편한 익숙함으로 그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누나는 사람들에게 리처드를 버리고 왔다고 했지만 실은 본인이 버려졌던 것이고, 리처드가 그녀를 다시 찾았을 때 그녀는 이성적으론 다시 가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리처드에게 돌아가려고 했다.
09 피부
매일 밤 그러하듯이, 우리의 조그만 매트리스 위에서 함께 잠이 들 것이다. 창문 밖 종려나무들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잔인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안개 속의 꿈을 믿으면서.
갓 결혼한 클로이와 '나'는 조그만 스튜디오 아파트 바닥에 발가벗고 누워 있다. 서로는 영원을 약속한 채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미래를 그려본다. 서로 죽고 못 사는 시절도 있지만, 어느 순간 동거인이자 이방인처럼 느껴질 순간들을 느끼는 시절도 올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상해 보지만, 그들은 잔인하지 않을 거라 믿으며 현재를 즐기고 있다.
10편의 단편 소설 중 가장 짧은 소설이었다.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이라는 제도, 그 관계의 끝에 대해 아주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결혼, 영원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곤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늘 행복할 수 없고, 아름다울 수 없다. 모든 관계, 삶, 마음은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는 것이다. 고난이 있어야, 달콤함도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10 코네티컷
그렇지만 나는, 그 저녁,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후, 개수대가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의 가장자리에서 걸어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정신적 건강 문제가 좋지 않아 몇년째 요양원으로 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아프고 난 뒤, 동내 사람들은 '나'의 가족을 피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집 앞에서 '나'의 어머니와 벤틀리 부인이 손을 맞잡고 껴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은 마치 단순한 위로, 위안, 우정의 형태가 아닌 애정이 묻어있는 모습처럼 비춰졌다.
그렇게 물증은 없지만 어머니의 벤틀리 부인의 관계에 의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의 이혼 소식을 듣게 되었다. 벤틀리 부인은 어떤 여인과 바람이 나서 이혼을 하고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가 오가던 와중에, 벤틀리 부인은 '나'의 집 앞에서 '나'의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15년 뒤, '나'는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었던 어머니와 벤틀리 부인과의 관계를 어머니의 연서를 통해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벤틀리 부인과 당시 떠나지 않고,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을 지금까지 해내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몇몇의 단편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점은 다양한 형태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어쩌면 가슴 속에 남는 찌릿한 사랑일지라도, 관계에 대한 책임 또한 사랑의 일부라고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 <코요테>에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놓지 않았던 것,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헤더가 물리학 교수를 평생동안 가슴에 남겨두고 살지만 남편을 떠나지 않은 것, <코네티컷>에서 어머니는 사랑하는 벤틀리 부인을 저버리고 가정에 최선을 다한 것. 책임 또한 사랑이라고 부르고, 잊지 못할 만큼 사랑했더라도 절제할 수 있는 감정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