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 도대체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거야

2025. 7. 8. 15:58그냥,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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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교보문고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기억과 욕망을 기록하는 작가

 

 아니 에르노는 1940년 9월 1일, 프랑스의 릴본(Lillebonne)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공장에서 일하다 나와 작은 식료품점과 카페를 운영했고, 이 덕분에 에르노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지만 소시민적 안정감이 있는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닌 학교는 주로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이 모인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에르노는 계급적 열등감, 질투, 우아함에 대한 동경, 물질적 욕망을 강하게 경험하게 된다. 이 경험은 그녀의 글 전체를 관통하는 ‘계급 간극에 대한 감정의 기록’으로 이어진다. 

 

 에르노는 젊은 시절부터 '말'과 '글'이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체감했다. 특히 중산층 가정 출신의 남편 필립 에르노와 결혼하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여성'이 되기 위한 매너와 언어를 흡수하려 애썼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부모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애증을 느끼며 괴리 속에 살았다. 이 모든 내면의 충돌은 훗날 <자리(La Place)><한 여자(Une femme)> 등의 작품에서 강렬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아직 안 읽어봄...)

 

 1963년, 23살이던 에르노는 피임이 불법이던 시대에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학생이었던 그녀는 병원도 갈 수 없었고, 몰래 낙태 수술을 받았다.그 경험은 신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수치심, 고립감, 생존의 위협을 동반했다. 그녀는 이 사건을 수십 년간 기억 속에 봉인해 두었다가, 2000년에 <사건(L’Événement)>이라는 책으로 공개했고, 이 작품은 프랑스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에르노는 이후 여성의 낙태권을 지지하는 운동에도 적극 동참했고, 자신의 경험을 감추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프랑스 여성 문학의 금기를 깼다.

 

 필립 에르노와는 18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갔지만 결국 이혼했고, 그 후에도 에르노는 여러 연애를 했다. 특히 <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에서는 기혼 남성과의 격정적인 불륜을 아주 차분하고 냉정한 문체로 기록해, 여성의 성적 욕망을 정면으로 다룬 문제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프랑스 문단에 큰 충격을 주었고, 여성의 입장에서 기다림, 집착, 무너짐을 정직하게 썼다는 점에서 자전적 소설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줬다고 한다.

 

“나는 살아본 것만 쓴다. 단 한 줄의 허구도 용납하지 않는다.”
— 아니 에르노

 

에르노의 문학은 ‘기억의 고고학’이라 불린다. 그녀는 허구를 쓰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살아낸 삶의 파편들만을 철저히 관찰하고, 해부하고, 기록한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자기 치료이자, 자기 고백, 그리고 자기 응시의 도구다. 문학을 통해 계급, 여성, 사랑, 욕망, 상실, 기억을 남기고자 한 그녀의 시도는 결국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단순한 열정>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단순한 열정"중에서 교보eBook에서 자세히 보기: https://ebook-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8954619585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걸까? 나는 이토록 내 감정에 솔직한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쓰는 일기조차도 끝까지 솔직하지 못했다. 나름 진심을 썼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은근히 나를 포장하려고 했다. 훗날 누가 내 일기를 보게 될까 봐서가 아니라, 어쩌면 내가 그 진짜 감정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거다. 

그런데 아니 에르노는? 그녀는 정말 철저하게 거짓 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걸까?

설령 그 안에 약간의 허구나 왜곡이 섞여 있었더라도, <단순한 열정>을 읽고 나서는 마치 남의 일기장을 몰래 읽은 듯한, 누군가의 맨살을 훔쳐본 듯한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에서 기혼 외교관 A와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고백했다. 그 글은 A와 관계를 끝낸 지 1년 후인 1991년에 출간되었고,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큰 논란이 일었다. 당시 ‘불륜녀가 뻔뻔하게 글까지 냈다’는 그녀를 향한 도덕적 비난도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여성이 공공연히 성욕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낯설고 불편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책 속에서 A는 국적조차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알랭 드롱을 닮았다는 묘사와 외교관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당시 주변 사람들 중 누군가는 눈치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솔직히, A의 아내도 알았을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을 감내하며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시대에 살고 있는 기혼 여성으로서, 그 아내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기억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퍼져나가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상처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 "단순한 열정"중에서 교보eBook에서 자세히 보기: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8954619585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왜 이 글을 썼을까?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감정을 그저 소비하려고 글을 쓴 게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그 관계에 마지막 말을 던진 게 아닐까? A는 그녀가 기다릴 때 연락하지 않았고, 오직 자기가 원할 때만 찾아왔다. 그런 A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 지친 에르노는 글을 통해 자신을 그 관계에서 끊어냈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를 단두대에 세우고, 욕을 먹을 걸 알면서도 그대로 자신을 내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단순한 열정"으로 사랑했던 기억을 어떻게든 남기고 싶었던 것도 있었겠지?

 

요즘 같았으면 어땠을까. 불륜녀라고 낙인 찍히고, 회사에 소문 돌고, 가족, 친구 다 잃게 하려고 사람들은 혈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는 그 모든 걸 선제적으로 감수하고 글로 먼저 꺼내놓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했고, 그가 자신을 농락했을지라도 그만큼 감당할 만큼 사랑했다고 당당하게 썼다. 그건 어쩌면, A의 아내가 어떤 방식으로도 복수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잔인하게 자아를 해체해버린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먼 나라, 다른 세대의 이야기지만, 누군가의 가정이 무너질 때 특정인 하나만 다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제일 나쁜 놈은 결국 A다. 말해 뭐하나. 

 

친구들로부터 꽃이나 책을 선물받게 되면 나는 기쁘기보다는, 그 사람은 내게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선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이내 ‘그 사람은 욕망이라는 값진 선물을 하고 있잖아’라는 생각으로 그런 마음조차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질투는 나에 대한 사랑의 유일한 증거라는 생각에, 나는 그 사람이 하는 말 중에서 질투의 증거로 생각되는 것은 탐욕스럽게 기억해두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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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람의 몸이나 옷에 나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것은 그 사람과 아내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일을 피하게 하려는 배려인 동시에, 그런 문제로 인해 그 사람이 내게서 떠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나름의 계산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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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람이 주말을 어떻게 보내는지, 어디에 가는지 자세히 알고 싶었다. ‘아마 지금쯤 그는 퐁텐블로 숲에 있을 거야. 거기서 조깅을 하고 있을 거야. 그는 도빌로 가는 중일 거야. 아내와 함께 해변을 거닐고 있겠지’ 하는 식으로 상상을 해보았다. 그 사람의 일정을 알면 안심이 되었다. 그 사람이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그 사람의 부정(不貞)에 대비했다. (이렇게 집요하게 상상을 하는 것은, 내 아들들이 파티에 가거나 바캉스를 떠났을 때 내가 그 장소를 알고 있으면 사고나 마약, 또는 익사의 위험에서 아이들이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과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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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에서 내가 가장 충격받았던 건, 그녀가 자신의 결핍, 고독, 혐오, 사랑, 열정을 그 어떤 미화도 없이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불륜 관계가 아닐지라도 누군가는 정말 그녀처럼 잡히지 않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갈망하고, 상대가 나를 나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관계를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스스로를 절제했던 시간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내 맘같지 않았던 사랑이 있었다. 그런 감정을 가졌던 나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내가 진정 놓을 수 없는게 상대방인건지, 이 관계인건지 헷갈렸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래서 <단순한 열정>을 읽을 때, 그때의 내가 계속 떠오르기도 해서 몰입감도 있었다. 그 책은 너무 솔직하고 너무 적나라해서 한편으론 폭력적이기도? 

 

사실 《단순한 열정》이 너무 충격적이라 그녀가 실제 관계 당시 썼다는 일기인 <탐닉>까지 읽어버렸다. (도파민 최고) 그리고 알게 됐다. 진짜 충격은 <탐닉>에 있었다. <단순한 열정>은 그나마 절제한 글이었다. 이 관계를 글로 정리하고 진짜 끝내려는 의지로 쓴 글이었다. 하지만 《탐닉》은 그야말로 욕망의 실시간 기록이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의존하고, 비참해지고, 망가져 가는 과정을 아무 정제 없이 적어 내려간 문장들이었다. 

 

 

지난 11월 6일(내가 S를 마지막으로 본 날) 이래 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럼에도 이 행복이 아무 동기가 없다는 사실이 약간은 나를 슬프게 한다. 어쨌든 쓸 것을 어떤 한 가지로든 정해야겠다. 이제 그만 망설여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 문 같은. 
"탐닉"중에서


아니 에르노는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에 빠졌던 한 여자의 비참함, 욕망, 수치심, 자기멸시를 글로 표현했다. 사람들에게 문장 하나하나 해부되어 자신이 어떤식으로 해석당할지 두렵지 않았을까? 심지어 나 또한 작가의 마음을 추측하면서 해부하고 있다. 예술가는 이렇게 용기가 필요한 사람인 것 같다. 

 

 


 

(+)추가

 

요즘은 ‘한 남자와 미친 듯한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누군가와 아주 깊은 관계’에 빠져 있다거나 혹은 과거에 그랬었다고 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고 공감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었더라도 그렇게 마구 이야기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맞아요. 나도 그래요.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 하고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말들이 내 열정의 실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단순한 열정"중에서 교보eBook에서 자세히 보기: https://ebook-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8954619585

 

언제부턴가 나는 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고난 뒤 항상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람을 따라하려고 나도 열심히 고백하고 난 뒤 너무 허무해 미쳐버린다. 진짜 알 수 없는 감정이다. 알 수 없는 감정 중 하나는 상대가 멋대로 나를 판단해버릴까봐 겁이 나는 것도 있다. 나는 아직 내 얘기의 일부만 떠들었을 뿐인데, 나를 다 아는 양 재단해버릴까봐 짜증이 솟구친다. 아마 뭐 눈에는 뭐가 보이는 거겠지? 아마도 내가 그런 사람인가보다. 

부모와 자식은 육체적으로 너무도 가까우면서도 완벽하게 금지되어 있어서, 서로의 성적 본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무척 불편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엄마의 알 수 없는 침묵과 멍한 시선 속에 드러나는 육체적 욕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은 그런 순간에 빠져 있는 엄마를 늙은 수고양이를 따라다니는 발정난 암고양이쯤으로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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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고의 심정이 너무 이해가 간다. 너무 우울한 시기를 겪고 있어 자신의 이야기를 마구 털어놓고 싶지만 아들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없다. 만약 내 부모가 연애를 한다면 말리지 않을테지만, 모두가 다 갖고 있는 성욕이 있다는 것을 자식인 나에게 털어놓는다면 나는 너무 불쾌할 것 같다. 아니 에르고는 자기 자식한테는 말하지 못했지만 결국 책을 출판해서 온 동네에 자신의 성욕을 공개했다. 아들들도 읽었겠지... 나는 암만 생각해도 아니 에르고는 진짜 용기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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